일본 교토에서 신라인의 후예를 만나다

"이 동네 신사는 한국 사람들이 1500년 전에 건너와서 만들었어요." 일본 교토에서 우연히 만난 동네 아주머니의 한 마디가 귀에 꽂혔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이들이 초기 일본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다. 특히 백제인이 건너갔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신라인의 역할은 부끄럽게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201410 12일 일본 교토 우즈마사 지역과 아라시야마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그 흔적을 명확하게 알게 됐다

몇 가지 우연과 필연이 겹치면서, 하루 동안 교토 지역에 건너와 자리를 잡고 초기 일본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한 진하승(秦河)과 하타씨 가문(‘’()을 일본어로 하타라고 읽는다)의 흔적을 따라가는 여행을 하게 됐기 때문이다.

고대에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이들을 도래인이라고 부른다. 백제 도래인, 고구려 도래인도 있지만 교토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신라 도래인 하타씨 가문이다.

 

일본의 국보 1호인 목조미륵반가상(사진)을 보기 위해 교토 우즈마사(太秦) 지역의 고류지(광륭사)를 가기로 했다. 사실 ‘1라는 숫자는 큰 의미가 없다. 관리하기 위해 붙인 번호일 뿐이다. 하지만 숭례문과 마찬가지로, 이 반가상은 ‘1라는 번호 때문이 아니라 그 예술적 가치 때문에 많은 이들이 찾는다.


일본 국보 1호 목조미륵반가상일본 국보 1호 목조미륵반가상


주변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사실 고류지에는 참배객을 위한 자체 주차장이 있다. 모르고 주변을 배회하다 사설 유료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교토는 주차비가 비싸기 때문에 실수로 비싼 값을 치르게 된 셈인데, 곧 그 주차비를 만회하고도 남을 보상을 받게 된다.

골목을 돌아 고류지를 향하는 순간, 모퉁이에서 일본 전통의상을 위에 걸친 어른들과 아이들 수십명이 줄지어 길을 걷는 것을 발견했다. 동행하던 토모 상이 말했다. “마쓰리다.”

마쓰리란 일본에서 신사별로 벌이는 지역 축제다. 1년이나 2년에 한 번씩 여는데, 일반적인 규칙은 없고 그 신사가 있는 지역 주민들이 알아서 규칙을 정해 운영한다. 공통적으로 일본 전통 의상을 입고 미꼬시라는 가마를 들고 동네를 행진하며 구호를 외친다.

행렬을 따라가 보니 지역 주민들이 한 작은 신사(사진)에 모여 행진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미꼬시를 준비해 놓고, 전통의상을 입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사케 신사의 모습.


우리가 들어서자 한 중년 여성이 반색을 하며 다가와 일본어로 환영의 뜻을 전했다. “어서 오세요. 마음껏 구경하세요.” 또 다른 중년 여성이 내게 다가와 영어로 말했다, “영어 할 줄 아세요? 어느 나라 출신인가요?”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놀라운 사실을 이야기했다. “이 신사는 원래 신라인이 건너와 만든 거랍니다. 한국 사람들이 와서 이 지역을 세웠어요. 그들이 사케도 전해줬고요, 방직 기술 같은 것도 전해줬어요!” 이 여성은 한국 사람이 만든 신사의 마쓰리에 한국인이 왔다는 게 너무나 반가웠는지 웃음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바나나와 쥬스를 가져다 주면서 호의를 베풀기도 했다.

 

우리가 방문한 신사는 오사케(대주) 신사였다. ‘술 신사라고 풀이되는 말이다. 이 곳은 신라 도래인 하타씨가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민들이 건네준 자료는 아사히신문 기사(사진)였다. 여기는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오사케 신사는 과거 신라 도래인 하타씨가 세운 곳이다. 하타씨 가문의 진하승은 쇼도쿠(성덕) 태자를 도운 기록도 있다. 쇼도쿠 태자는 말구유에서 태어났다는 신화가 전해지는데, 이는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일본인들이 진하승을 얼마나 위대하게 생각했는지는 교토에 있는 하타씨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더 많이 드러나게 된다.

 

우리는 오사케 신사에서 유쾌한 시간을 보낸 뒤 원래 목적지인 고류지로 향했다. 고류지 정문을 지나 직진하면 신영보전이 있다. 신영보전 안에는 그 유명한 목조미륵반가상이 있다. 한국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반가상과 너무나 유사한 모습이다. 이 목조미륵반가상은 신라에서 보내준 것으로 전해진다.

역시 아름다웠다. 나는 그 절대미소 앞에 한참을 말과 생각을 잊고 서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목조미륵반가상이 금동미륵반가상보다 더 은은한 매력을 지닌 것 같다는 느낌도 받았다. 신영보전 안에는 일본 헤이안 시대의 중요문화재 불상들이 여러 점 있는데,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다른 불상들이 모두 비장하거나 고통을 애써 이겨내려는 표정인 데 비해 목조미륵반가상만은 모든 것을 초월한 듯 은은한 미소를 보여준다. 희망의 부처다.

그런데 신영보전의 목조미륵반가상 바로 옆에는 놀랍게도 진하승 부부의 초상조각(사진)이 있다. 헤이안 시대 수많은 중요문화재를 제치고 당당히 국보 1호 바로 옆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고류지에 있는 진하승 부부 초상조각.


고류지는 바로 진하승 가문의 절이었다. 특히 쇼도쿠 태자가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던 때 이 절을 세웠다. 목조미륵반가상도 그가 신라로부터 받아 고류지에 둔 것이다.

진하승의 영향은 신영보전을 나와 바로 왼쪽을 바라보니 더 명확하게 느껴졌다. 거기에는 우즈마사이라는 작은 신사가 있다. 진하승을 존경하다 못해 아예 신으로 모신 신사다. ‘우즈마사신명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우즈마사(太秦)이란 하타씨’(진, ) 앞에 클 태()자를 더해 만든 말이다. 고류지가 있는 지역 일대를 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고류지를 거닐다 나와 다시 오사케 신사 앞으로 향하니 아까 미코시를 밀고 떠났던 지역주민들이 다시 신사 쪽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들은 미코시를 밀고 가다가 집집마다 들러서 미코시를 들고 흔들며 왓쇼이, 왓쇼이를 외친다. (도쿄에서 참가했던 마쓰리에서는 무거운 미코시를 들고 갔는데 교토에서는 바퀴 달린 것을 편하게 밀고 간다. 다른 방식이다. 두 개의 마쓰리를 비교하는 글은 따로 작성한다.)

아까 만났던 영어 잘하는 중년 여성이 다시 따라오면서 친절하게 해설해 준다. “이 구호도 한국말에서 온 거래요.” 그러고 보니 왔어요와 비슷하다. 집집마다 들러 우리가 왔어요’, 또는 신이 왔어요라고 외치는 셈이다. 일본어에는 없는 단어라고 한다.


우즈마사를 떠나 가까운 곳에 있는 아라시야마로 향했다. 여기에는 도월교가 있다. 역시 하타씨 가문이 주변에 제방을 쌓고 다리를 놓아 개발한 지역이다.

근처 풍광도 아주 아름답다. 다른 곳과 차별화된 교토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껏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근처 텐류지(천룡원)의 아름다운 정원과 대나무 숲의 정취도 한껏 느껴볼 수 있었다. 손으로 만든 정통 일본식 소바(사진)의 맛도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얼른 떠나야 했다. 하타씨의 또 다른 흔적인 마츠오 대사를 방문해야 했기 때문이다.

 

마츠오 대사는 술의 신을 모신 신사다. 그런데 하타씨 가문이 세운 신사이기도 하다.

마츠오 대사가 술과 인연을 맺은 이유는 물 때문이다. 이 신사 자리에는 영험한 물이 있는데, 이 물로 술을 담그면 상하지 않고 맛이 좋다는 이유 때문에 술의 신을 이 자리에 모시게 됐다고 한다.

신사의 문을 지나는 순간부터 신의 향기가 강하게 느껴졌다. 들어가자마자 왼쪽에는 술 자료관이 있다. 그리고 신사 옆에는 술통을 잔뜩 쌓아 전시(사진)해 두었다. 심지어 신사 안에서 술을 판다. 이름은 어신주’.


마츠오 대사 옆에 쌓아 둔 술통들.


신사에서는 아기의 건강을 비는 의식이 진행 중이었다. 일본의 아기들은 상당수가 1년이 되기 전에 신사에서 이 의식을 치른다고 한다. 병을 가져오는 악신을 쫓기 위해서라고 한다. 짧고 간략한 의식이었다. 한국의 무당굿보다 간단하게 느껴졌다. 신관 역시 매우 현대적인 예절을 갖춘 사람이었다.

마츠오 대사에는 보물관이 있다. 입장료를 내고 보물관에 들어가 보니 거기에는 정말 보물이 있었다. ‘남신 장년상’, ‘남신 노년상’, ‘여신상이 있는데, 이 가운데 남신상 두 개는 모두 하타씨의 조상을 그린 상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그런데 고류지에서 본 진하승의 모습과 매우 비슷했다. 아마도 여기서도 진하승을 신으로 모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밖에도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여러 상이 있었는데, 하타씨와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신라에서 일본으로 곡주를 전수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 일본 사케는 사실 경주로부터 온 것이다. 한국에서 곡주가 거의 사라지고 일본이 지방마다 수백 수천가지 일본 사케를 갖춘 곡주의 천국이 된 것은 참 아이로니컬한 일이다.

마츠오 대사 보물관에서 나오는 길에는 또다른 보물이 있었다. 바로 물이 좋아서 이 자리에 술의 신을 모시게 되었다는이유가 된 그 우물’(사진)을 발견한 것이다. 바로 한 모금 맛봤다. 영험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물 맛은 정말 좋았다. 맛 좋은 일본 사케에서 알콜을 뺀 듯한 느낌이었다.


마츠오 대사 보물관 앞에 있는 '영험한 물'이 나온다는 우물. 일본 양조장에 가면 이런 우물을 만들어 놓고 술보다 먼저 물을 맛보게 하곤 한다.마츠오 대사 입구에는 한류 영화배우 이준기씨의 일본 팬이 써붙여 놓은 글이 있었다. 한국에서 건너온 하타씨가 이 곳을 세웠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하타씨는 5세기 후반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도래인 가문이다. 이 성씨는 도래 씨족 가운데 최대 규모를 자랑했고, 일본의 문화, 경제, 종교, 기술, 정치 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구체적으로는 신사의 중년 여성이 이야기해준 것처럼 양잠과 주조 기술 및 제방 목공 등의 기술을 전파했다.

5세기 후반 궁월군이 신라에서 120현민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기록이 하타씨의 일본 도래에 대해 남아 있는 기록이다. 120현민의 의미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 작게 해석하면 120명과 함께 갔다는 뜻일 테고, 크게 해석하면 120개 지역의 주민들과 함께 갔다는 뜻일 테니 편차는 크다. 어쨌든 당시 교토 지역 일대를 장악했던 하타씨의 위상을 생각해 보면 꽤 많은 숫자가 함께 건너갔다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신라인 진하승은 이런 하타씨 가문 중 한 사람인데, 쇼도쿠 태자의 브레인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쇼도쿠 태자(聖德太子, 574~622)는 일본 아스카 시대(538~710)의 전설적 정치지도자다. 한국의 삼국 시대 말기 신라의 전성기와 비슷한 시기에 일본을 통치했다. 아스카 시대는 일본 나라 근처 아스카에 성과 도시가 만들어진 시기라는 이유로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

쇼토쿠 태자는 아스카 시대의 중심 인물로 여겨지는데, 스이코 천황(推古天皇시절 섭정을 맡았다. 일본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정치지도자로 꼽힌다. 본명은 우마야도로마굿간이라는 이다. 마굿간 앞에서 태어났다는 전설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일본에서 쇼토쿠 태자가 얼마나 위대하게 여겨지는지는 그의 초상화가 지폐에 등장했던 횟수를 보면 알 수 있다. 그의 얼굴은 1930 백엔권 지폐에 처음 등장한 이래로 1엔권과 5천엔권, 1엔권 지폐 등 모두 일곱 에 걸쳐 지폐에 등장한다. 일본에서 지폐도안에 어간 횟수가 가장 많다고 한다. 따라서 일본 국민들은 쇼토쿠 태자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보면 된다.

쇼토쿠 태자는 당시 수나라와의 외교관계도 수립하고, 정부의 체계와 헌법도 만들어 일본 정치체제를 정비했다. 또한 일본에 불교를 보급해 키운 사람이기도 하다.

 

마츠오 대사를 마지막으로 1500여년 전 신라인 하타씨와의 교토 여행을 마무리했다.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고도, 한국인을 만나 신난다는 표정으로 오사케 신사를 소개하던 그 주민이 자꾸 떠올랐다. 어쩌면 한국에서 와서 이 나라를 세웠다는 게 한국인 앞에서 부끄러운 일일 수도 있을 텐데. 민족주의적으로 생각하자면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실은 그 아주머니의 반응이 더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 집이 부처가 태어난 동네에 있는데 부처가 나타나면 반갑고, 일본인이 세운 동네에 일본인이 나타나면 반가운 것 아닌가? 일본은 군국주의시대 이전 한 번도 단일민족국가인 일이 없다는 게 최근의 연구 결과다

사람들은 섞이고 섞인다. 뿌리를 찾으면 그저 반가울 뿐이다. 그 뿌리가 내 것인지 네 것인지 가리고 나눌 필요는 없다. 

국가란 무엇이고 '민족'이란 무엇일까. 섞이고 섞인 게 민족이고 국가라면 그들은 왜 나누고 다투고 증오할까. 다시 생각해보게 된 하루였다. 하타씨 가문으로부터, 또는 일본 교토의 동네 아주머니로부터, 좋은 질문을 얻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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