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한국의 록펠러가 될까



최근 로런스 서머스 미국 전 재무장관(하버드대 교수)과 에드 볼스 영국 그림자내각 재무장관(노동당 및 협동조합당 의원)이 공동의장을 맡은 ‘포용적 번영에 관한 위원회’가 방대한 정책보고서를 민간 독립 싱크탱크인 미국진보센터(CAP)를 통해 발표했다. 선진국들을 뒤덮고 있는 불평등 심화 현상에 대한 정책 대안이다. 이 보고서를 계기로 불평등 의제에 대한 전면적 토론이 시작됐다. 다음 미국 대통령의 핵심 의제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벌써 나온다.


1년 반 전, 미국진보센터는 서머스 장관 및 볼스 의원을 포함해 미국과 유럽의 정치인, 노동조합 대표자, 학자, 투자자 등을 모아 이 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전문가들을 한자리에 모아 ‘불평등 심화’라는 하나의 문제에 대해 의견을 모으고 합의된 대안을 내도록 한 것이다. 그 연구 결과가 보고서에 담겼다.


이런 일은 대학의 학술연구 능력만으로도, 시민단체의 실천 능력만으로도 소화하기 어렵다. 전문성과 독립성과 실행력을 함께 갖춰야 가능하다. 민간 독립 싱크탱크의 가치가 빛나는 순간이었다.


한국에서도 이런 일이 가능할까? 최근 그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등이 연 포럼에 참석해 발표했다. 이 포럼에서는 한국 민간 독립 싱크탱크들한테 가장 취약한 재정 문제도 거론됐다. 이숙종 동아시아연구원장은 “미국 포드재단과 같은 재단법인을 만들어 민간 정책연구기관을 지원하도록 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 워싱턴의 싱크탱크를 중심으로 한 정책지식 생태계가 떠올라서다. 싱크탱크의 막강한 영향력을 뒷받침하는 것은 사실 독립적 재원이고, 그 재원의 상당 부분이 록펠러재단이나 포드재단 같은 재단법인의 기금에서 정책연구 지원금 형태로 온다. 많은 싱크탱크가 전체 재원에서 작게는 30%에서 크게는 80%가량까지를 재단법인으로부터 구한다. 이 재단들은 처음에 독지가의 거액 기부로 만들어졌지만, 이제 시민들로부터 모금해 싱크탱크 등에 배분하는 모금가 역할을 한다.


정부 돈이나 특정 기업 돈에 대한 의존도가 낮으니 독립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장기적인 관점을 지켜낼 수 있다. 실제로 이들 재단은 정책연구 내용이 충실한지, 의회나 정부나 언론을 통해 영향력을 발휘했는지, 투명하게 집행되었는지 등에 대해서만 평가한다. 연구 결과가 입맛에 맞는지 아닌지에 대한 논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미국 애스펀연구소는 재원의 절반가량을 포드·록펠러 등의 재단법인에서 받는다. 이 연구소는 외교안보정책이나 경제정책 등 굵직한 정책 영역에서 의사결정에 영향을 끼치는 연구를 수십년 동안 이어가고 있다. 경제정책연구센터(CEPR)는 포드재단의 지원으로 운영되며 진보적 경제정책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연구소로 성장하고 있다. 록펠러재단은 국경을 넘어 한국 희망제작소의 ‘아시아 사회혁신 사례연구’를 지원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일일까? 그렇지만은 않다. 연간 370억원의 세금을 쓰는 새누리당의 여의도연구원과 새정치민주연합의 민주정책연구원 등 정당연구소들만 결단해도 큰 변화가 일어난다. 정당연구소가 이 돈을 정치전략 수립 대신 민간 독립 싱크탱크들에 대한 정책연구 지원사업에만 써도 거대한 진전이 일어날 것이다. 미국 재단들이나 독일 정당연구소들이 이미 하고 있는 일이다. 물론 록펠러 같은 독지가가 나타나 민간재단이 만들어진다면 더 좋겠다.


한국 사회 지적 양극화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이성적 정책토론이 자리 잡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민간 싱크탱크를 튼튼히 하면 최소한 이성적 토론을 위한 지적 플랫폼이 만들어진다. 이제 한국도 그 정도는 가질 만한 나라가 되지 않았나.


이원재 희망제작소 소장


2015. 1. 28. <한겨레>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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