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준 기자.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새벽 선잠을 깨자마자 황망한 소식을 접했다. 구본준 <한겨레> 기자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미디어오늘> 등에 기사화됐고, 많은 이들이 페이스북을 통해 이 젊은 기자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놀라움과 슬픔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구 기자는 내가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한겨레신문사의 2년 선배였다. 그에 대해 나는 특별한 기억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하나는 그가 페이스북을 통해 한 번 공개했던 아래 에피소드였다.
1998년 연초쯤이었나, 회사에 들어가니 부장이 나를 불렀다.
부장은 거의 하늘이었고, 나같은 쫄따구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일은 실로 드물었다. 혹시 내가 뭔 잘못을 했나 두려워하며 부장에게 갔다."야, 구본준, 우리 부서비가 펑크가 났다."
신문사 사회부는 편집국에서 가장 큰 부서다. 회식 한번 하면 비용이 만만찮았다.`어째 회식을 자주 하시더니...근데 내가 총무도 아닌데 왜 나한테?'
"아, 네...문제네요."
"그래서 부서비를 벌어야겠다."
"...?"부장은 갑자기 신이 나서 아이디어를 말했다.
"우리 부서가 책을 쓰는 거야."
"네? 책을 써요?"
"조금 있으면 대학 입학 발표가 나잖아. 대학 신입생을 위한 대학생활 길잡이책을 쓰는 거야. 그 인세로 부비를 확보하는 거지. 어때? 괜찮지?"하늘 같은 사회부장이 물으니 대답이야 당연했다.
"아, 네...괜찮...네요."당시 사회부장은 무섭기로 소문난 선배였다.
그가 경찰기자 지휘자인 시경출입기자 시절,
ㅈ선배는 그가 친 삐삐에 빨리 답하러 무단횡단을 하다 택시에 살짝 치었는데,
놀란 택시기사에게 `괜찮다'며 벌떡 일어나 공중전화로 달려간 일화로 유명하다.
조금이라도 회신이 늦으면 불벼락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부장의 성격은 안좋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그러니까 우리 사회부 이름으로 책을 쓴다. 니가 써."
"네? 저요?"
`아니, 이게 무슨 소리지?'
입 안에선 `저기요...그걸 꼭 제가 써야하나요?'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무섭기 짝이 없는 부장에게 새파란 3년차 쫄따구 기자가 감히 거부를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너한테 수습 10명을 다 줄테니, 걔네들을 데리고 책을 쓰는거야. 입학철 이전에 책이 나와야하니까, 2월까지 써."
"2월이요? 저기...두 달도 안 남았는데요?"
"한 달이면 충분하지! 쓰는 거야!"머리에선 온갖 생각이 오갔다.
가장 먼저 `X됐다'는 비속어가 머리에 떠올랐고,
그 다음엔 `아니 책을 내가 어떻게 써?'로 생각이 이어졌다.혼자 죽을 수는 없었다. 정말 큰 용기를 내 말했다.(그만큼 부장은 무서웠다...)
"근데요, 제가 신문밖에 안 해봤으니까 <한겨레21>에서 긴 기사나 피처를 써본 사람을 좀 붙여주시면...안 될까요?""그래? 누구랑 하고 싶은데?"
어차피 부장은 결심한 상태였고, 한번 마음 먹으면 반드시 해야하는 양반이었다.
까라면 까야하는데 혼자 깔 수는 없는 일.
"강ㅅㅇ 선배하고요, 김ㅊㅅ이 <한겨레21>을 했으니까 붙여주시면..."
"그래? 알았어, 야 강ㅅㅇ 김ㅊㅅ 이리 와봐!"두 사람은 의아한 표정으로 왔다가 자초지종을 듣고 똥씹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우리 표정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부장은 더욱 신이 나서 선언했다.
"이제 너희 셋은 2월 이전에 책을 완성한다! 바로 시작해!"부장의 지시를 듣고 돌아오는 길, 강 선배를 나를 죽이려고 주먹을 들고 쫓아왔고,
김ㅊㅅ은 "야, 이 웬수야"를 연발했다.
하지만 뭐 어쩌랴, 우리 셋은 그 날부터 `책 만들기'에 돌입했다.
세 사람 모두 책이라곤 써본 적이 없었고, 믿을 것은 눈은 초롱초롱거리지만 아무런 업무 능력이라곤 없는 입사 1~2개월 쯤 된 수습기자 10명뿐이었다.대학생이 된 신입생들에게 대학 생활의 비전부터 동아리생활, 리포트 잘 쓰는 법, 심지어는 성교육 지식까지 다양한 정보를 그러모아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수습들은 매일 대학을 돌아다니며 취재를 했다.
안ㅊㅎ씨는 `막걸리 빚는 동아리'인 `진균생물연구회'를 찾아갔고, 정ㅅㄹ씨는 로봇 동아리를, 지금은 유명 경제평론가가 된 이ㅇㅈ는 벤처회사를 차린 대학생을 인터뷰했다.
수습기자 중 토익 점수가 가장 높은 이ㅂㅇ은 영어공부 잘하는 법에 대해 썼고, 안ㅅㅊ은 `알바의 제왕'인 자기 선배를 만나 알바 잘 뛰는 법을 정리했다.수습이 취재해온 메모를 세 명이서 정리해 글로 만들고, 사진을 찾아 모으고, 따로 취재해 각자 또 글을 쓰고...전쟁처럼 4주를 보냈다.
우리 셋은 2주 동안 회사 빈 방에서 먹고 자며 글을 썼다.그 때, 배웠다.
정말 황당해보이는 아이디어도 미친 듯이 하면 실현되기도 한다는 것을.정확히 1개월쯤 뒤 책은 나왔다. 우리가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책이 제법 팔렸다!
책은 1만부 이상 나갔고, 이듬해엔 개정판도 냈다.그 때 책의 꼭지 중 하나가 `패션'이었다.
신입생들에게 옷 잘입는 노하우를 어떻게 쓰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우리가 고른 아이템은 당시 가장 인기 좋았던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의 남녀 주인공들의 패션을 취재해 분석하는 것.
(당시 `남자 셋 여자 셋'의 인기는 대단했다. 송승헌의 출세작이기도)
이ㅈㅇ씨가 여섯 배우의 코디네이터를 만나 각 배우의 체형의 장단점을 듣고, 이를 커버하는 옷입기 요령을 설명하는 것으로 구성했다.왜 이 쓸데 없는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쓰게 되었느냐면,
벌써 16년 전인 그 때 `남자셋 여자셋'의 주인공 중 하나인 우희진이 나오는 드라마게임을 보다가 문득 이 일이 떠올라서다.생각해보니 참 별짓을 다 했다. 부비를 마련하기 위해 책을 쓰다니.
물론 부장은 부비도 중요했지만 기자들이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일을 해보는 게 중요하다 생각해 실험을 해보고 싶었던 것이었다.어느새 제법 오래전 일이 되었다. 부장은 편집국장을 지낸 뒤 회사를 떠났고, 강선배도 회사를 떠났고, 김ㅊㅅ도 회사를 떠났고, 이ㅇㅈ도 떠났다. 그리고 이 시절 처음 같이 일을 하게 된 뒤 내 멘토가 되어준 김ㅇㅅ 선배도...
그렇게 고생해서 만든 책 덕분에 부비는 제법 생겼다.
그러나, 역시 회식 몇 번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도 덕분에 책을 만든 우리도, 그 인세로 메뉴를 고급화해 한바탕 웃고 즐겼던 동료들도 모두 재미있는 추억을 얻었다.몇 년만에 본 `드라마게임' 덕분에 이 웃기는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그런 책을 만들었다는 것도 종종 잊는다. 우희진은 하나도 안 늙고 그대로인데 말이다.
여기 등장하는 이ㅇㅈ는 물론 ‘이원재’의 약자다. 바로 나다. 이 글을 보고 나는 아래와 같은 페이스북 포스팅을 했었다.
Just Write It?
제가 글을 쓰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는지, 어떤 태도가 필요한지를 익혔던 아주 중요한 순간을 제 회사 선배이기도 했던 한겨레 구본준 기자께서 회고해 주셨네요.
그때 밤샘하며 혼나가며 작업을 진행하면서 소재, 방향, 마감, 목적. 이 네 가지가 분명히 있으면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요. 물론 예술적 가치가 있는 글쓰기의 경우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이 네 가지가 있어야 글을 직업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글을 쓰려는 분들이 소재만 깊이 파고들거나 방향만 떠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중요한 일입니다만, 칼럼의 형태로든 책의 형태로든 글이 ‘생산’ 되려면 무엇보다 마감시간과 목적이 분명해야겠지요.
당시에 신문사 선배 기자들과 수습기자들이 했던 일은 그런 관점에서는 결코 ‘무식한’ 작업이 아니었답니다. 오히려 가장 효율적으로 글을 ‘생산’하는 체계를 단시간에 만들어 가동했던 경험이었지요.
사실 글뿐 아니라 다른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식이라든지, 공부라든지, 다른 작업을 떠올려 보세요. 아마 네 가지 조건을 잘 갖춰야 무언가를 규칙적으로 ‘생산’하는 게 가능할 겁니다.
나이키는 ‘Just do it!’이라고 외쳤지만 그 선배들이 우리에게 외쳤던 말은 ‘Just write it!’만은 아니었던 셈이지요. 시스템으로 글을 쓰는 경험을 했던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ㅇㅇㅈ
https://www.facebook.com/lee.wonjae.fb/posts/10203493202510231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던 때였다.
구 기자로부터 원고청탁을 받았다.
집필 지시를 하던 그로부터 원고청탁을 받으니 낯설면서도 즐거웠다.
열심히 썼던 글이 아래 링크에 있는 글이다.
내가 붙여 보낸 제목은 ‘정주영 딜레마’였는데 신문에는‘정주영 위험신화 그립소만’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됐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10610.html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한 뒤 10년이 지난 2007년, 나는 한겨레신문사로 다시 돌아오게 됐다. 유학을 다녀와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일을 하다가, 한겨레경제연구소를 설립하러 돌아온 것이다. 그 결정을 내린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전화를 받았다. 처음 소식을 듣고 전화한 이들 중 하나였다.
“당신이 돌아온다면 제대로 된 그랜드 디자인을 해야 할 거야.”
용기를 주는 말이었다.
그는 사람을 어떻게 격려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한겨레경제연구소를 설립한 뒤, 그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책을 쓰고 강연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내게 글쓰기를 가르쳤던 그다. 누구보다도 필력이 뒤지지 않는 기자였다.
한 자리에 앉아서 두 시간 동안 인문 사회 과학 기업 등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새로운 이야기를 펼쳐놓을 수 있던 그다. 누구보다도 ‘말발’이 뒤지지 않는 이였다.
그런데 그는 후배인 내게 배우겠다며 찾아와서 자신의 출판기획서와 파워포인트를 펼쳐놓고 의견을 들었다.
그는 그만큼 겸손했고 배움에 진지했다.
2010년, 나를 새로운 책을 내겠다는 생각을 갖고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책을 많이 팔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고, 어떤 출판기획자의 조언을 듣고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 같은 기업가들의 이야기를 써볼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구 기자를 만나 상의했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좀 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써야지!”
그래서 1년을 더 고민하며 쓴 책이 <이상한 나라의 경제학>이다.
그는 내가 어떤 글쟁이어야 하는지를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2012년, 나는 안철수후보 캠프에서 일하기 위해 한겨레경제연구소를 떠났다.
그는 “어디에 있든지 이 나라에 좋은 일을 할 것”이라고 격려해줬다.
다시 한 번, 그는 사람을 어떻게 격려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격려가 내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제대로 전하지 못했던 게 미안해서 눈물이 난다.
언젠가 다른 세상에서 그를 다시 만나 내 기획을 보여주고 통렬한 충고를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