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 피케티
존 메이너드 케인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924년 시드니 볼 재단 초청으로 ‘The End of Lassaiz-Faire’(자유방임주의의 종언)라는 제목의 강연을 연다. 당시 주류를 이루던 경제학의 자유방임주의 조류를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이 강연에서 그는 ‘공공 복리를 사적 기업들에게 맡겨둔 채 그대로 두면 적자 생존 원리에 따라 가장 높은 효율이 달성된다는 자유방임주의 믿음은 틀렸다’고 지적한다. 이런 생각은 불확실성, 지나친 경쟁이 발생시키는 비용, 생산과 부가 집중되는 경향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21세기 자본론>(Le Capital au XXIe siècle)을 써서 세계적으로 화제를 불러모으고 있는 토마 피케티 프랑스 파리경제대 교수는 어쩌면 90년 전 케인스가 던졌던 것과 유사한 메시지를 던진다. 자본주의가 지금처럼 진행되다가는 자본 소유의 집중도가 점점 더 높아져서 ‘세습자본주의’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는 경고다.
이 이야기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가 개인이 능력과 노력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라는 경제학자들의 오랜 믿음을 깨뜨린다. 조세제도 등 국가의 대대적인 개입 없이는 자본주의가 실패하고 말 것이라는 이야기니 말이다.
그가 쓴 <21세기 자본론>이 전세계 출판시장에 열풍을 불러오고 있다. 2013년 프랑스에서 출판된 뒤 2014년 3월 미국에서 출간된 이 책은 9월까지 프랑스에서 5만부, 미국에서 25만부가 팔리는 등 전세계적인 열풍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국에서도 2014년 9월 출판되자마자 시중 서점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등 인기를 끌고 있다.
대중들의 폭발적 반응과 더불어 세계적 경제전문가들이 앞다퉈 이 책에 대해 호의적 또는 비판적 평론을 내놓으면서 관심과 열기를 더하고 있다. 폴 크루그먼, 조지프 스티글리츠 등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미국의 주요 경제학자들이 연이어 이 책을 칭찬하면서 열풍이 일자, 그레고리 맨큐 등 보수적 주류경제학자들은 이를 비판하는 글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세계적으로 토론이 뜨거워지면서 국내에서도 다양한 경제전문가들이 비평을 내놓으면서 열기가 한국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이 책에서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길래 이렇게 관심이 뜨거울까?
요지는 명쾌하다. 피케티는 자본주의가 전반적으로 불평등이 심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케인즈가 당시 주류이던 자유방임주의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펼친 것과 비슷하게, 과거 성장과 분배 사이의 관계를 먼저 밝혀 정설로 알려진 사이먼 쿠즈네츠의 역U자형 곡선 이론을 반박하면서 논지를 펼친다. 쿠즈네츠는 산업화 초기에는 불평등이 커지지만 성장과 함께 다시 작아진다는 논리를 펼쳤다.
피케티에 따르면 1914년부터 1945년까지 전쟁과 급진적 분배 정책으로 영국과 미국에서 불평등이 작아지는 경향을 보였지만, 이후 불평등은 다시 커진다. 쿠즈네츠는 전쟁의 충격으로 인한 일시적 현상을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사실 장기적으로 불평등은 끊임없이 강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런 논지를 펼치기 위해 세계 각국의 방대한 부와 소득 분배 데이터를 주로 과세자료를 통해 수집해 분석했다. 15년에 걸쳐 이 작업을 진행했다.
피케티 저작은 전반적으로 경제적 불평등 이슈를 다루고 있는데, 소득이 아니라 ‘자본’(부)으로부터 분석을 시작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자본’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단순히 분배 자체가 아니라 분배의 결과로 나타나는 지배력의 변화까지 들여다볼 수 있으며 일반 법칙을 도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자본 소유의 장기 분포를 보면, 1차 세계대전 직전인 1900~1910년 유럽 각국의 자본 소유는 극도로 집중되어 있었는데,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대공황 등을 거치면서 반전이 일어나 1970년대까지는 불평등도가 완화된다. 전쟁과 공황 탓에 불가피하게 정부에 힘이 몰리고 이를 토대로 높은 세율과 누진세제가 도입되면서 양상이 바뀐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현대자본주의는 역사상 가장 불평등한 시기이던 프랑스의 ‘벨 에포크 시대’ 또는 미국의 ‘도금시대’로의 귀환하기 시작했다. 벨 에포크 시대와 도금시대는 불평등이 극에 달했을 때인데, 여러 수치로 볼 때 1980년대 이후 분석대상 국가들이 그 시기의 불평등도와 비슷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영국 미국 등 선진 각국은 사상 최고 수준의 부의 불평등 상태에 처해 있다.
노동과 달리 자본에서 나오는 소득은 이를 보유한 소수에게 집중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한 나라의 국민소득 중 자본소득의 비중이 늘어나면 소득불평등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자본을 소유한 부자들이 더 많이 저축하면서 자본은 더 크게 늘어나며 불평등이 세습되는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피케티는 자본수익률(r)과 경제성장률(g) 사이의 관계에 따라 불평등도가 달라지며, r>g인 상태에서는 자본소득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커지며 불평등이 심화하게 된다는 이론을 세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자본수익률은 4~5% 수준에서 유지되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선진국에서 경제성장률이 이를 현저히 밑돌고 있다. 따라서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을 웃돌며 불평등이 심화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자본소득의 비중도 더욱 높아지면서 세습자본주의 시대가 개막되리라는 게 피케티의 생각이다.
자본소득이 커지면 자본소유자들이 높은 저축성향을 보이며 이를 다시 저축하며 더 키우게 된다. 이런 자본이 상속되면서 후세대는 자본을 물려받아야만 경쟁할 수 있는 세습자본주의 시대에 살게 된다. 결국 능력과 노력을 통해 시장의 승자를 가린다는 자본주의의 약속은 형편없이 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바꾸려면 자본에 대해 높은 세금을 매겨 자본수익률을 떨어뜨리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자본소득의 비중이 낮아지면서 불평등이 완화된다. 따라서 피케티는 글로벌 공조를 통해 자본과세를 도입하면서 강력한 누진세를 적용할 것을 제안한다.
피케티의 통계와 이론에 대해서는 반박도 많지만, 대부분 전문가들이 불평등이 심화하고 있으며 이런 현상이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는 현상 자체에 대해서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자본이 없는 사람은 시장에 진입해 경쟁할 기회 자체를 얻지 못한다는 ‘세습자본주의’라는 표현은 대중으로부터 큰 공감을 받고 있다.
특히 한국사회는 ‘세습자본주의’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소비할 만한 환경에 처해 있는 나라다. 한국은 해방 이후 토지개혁으로 자산분배가 상대적으로 평등해졌었다. 다들 비슷한 출발선에서 시작해 경쟁했던 셈이다.
그러던 한국사회에 최근 본격적으로 ‘상속을 통한 자산 형성’이 시작되고 있다. 재벌기업들은 2세를 거쳐 3세로 경영권을 본격적으로 물려주고 있다. 1950년대 중반~1960년대 중반에 태어나 1980~1990년대 호황을 거치며 부동산 자산을 취득하고 불렸던 베이비붐 세대 중 고소득자들도 자산을 다음 세대에게 상속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에 따라 상속받을 기업이나 자산이 없는 계층의 박탈감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해질 전망이다. 상속 없이는 계층상승 기회가 없다는 생각이 확산된다.
그럴 만도 하다. 대학진학률이 70%를 넘어서고 중소기업이 무너지면서 대학을 졸업해도 안정적인 정규직 일자리를 구하기가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워졌다. 사교육비가 늘어나 재산이 없는 계층은 자녀에게 좋은 교육기회를 주기도 더욱 어려워졌다.
이러니 ‘세습자본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 어느 때보다도 높아지는 것이 당연하다. 한국의 ‘피케티 열풍’은 이유있는 열풍이다.
특히 한국사회의 경우, 불평등 자체도 문제지만 ‘세습자본주의’가 굳어져 젊은 세대가 상속 이외에는 새로운 기회를 찾기 어려워진다는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즉 불평등의 완화 자체보다는 불평등 완화를 통한 ‘기회의 확대’를 중심으로 정책 대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일부 섣부른 논자들은 피케티의 논리가 반자본주의적이라고 지적한다. 잘못된 지적이다.
피케티가 불평등과 ‘세습자본주의’를 우려하는 이유는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능력주의’(meritocracy)가 무너질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자본수익률과 경제성장률의 흐름이 지금처럼 이어진다면, 능력있는 개인이 기회를 얻어 성공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의 약속이 깨어지고 말 것이라는 우려다.
어찌 보면 피케티가 해결하려는 문제도 불평등 그 자체는 아니며, ‘세습자본주의를 구축해 시장 진입의 기회를 막을 정도로 심각해진 불평등’이다.
피케티의 주장 속에서 나는 케인스의 목소리를 듣는다.
케인스는 자유방임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던 강연에서, 당시 유럽에 새로운 사조로 떠오르고 있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명확히 하면서 자본주의를 옹호한다.
그는 ‘현명하게 관리만 한다면 자본주의가 지금껏 출현한 그 어떤 시스템보다 경제적 목표를 더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자유방임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사회주의도 바람직하지 않게 여겼다. 그는 ‘중도주의’(middle-way)를 내세운 경제정책가였다.
케인스가 보기에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이유는 ‘특정한 개인들과 거대 기업이 불확실성과 무지를 이용하여 이익을 얻고, 그 결과 극단적인 부의 불평등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 결과 ‘고용이 불완전해지고, 사업가들의 합리적인 기대마저 충족되지 못하며, 효율과 생산에 차질이 발생’하기까지 하면서 자본주의적 성장 자체에 문제가 생긴다는 이야기다. 극단적인 부의 불평등이 자본주의 유지와 성장 자체에 문제를 일으킨다는 시각에서 케인스와 피케티는 분명히 만난다.
풍부한 데이터를 통해 입증하고 있으면서, 자본주의 기본법칙을 과감하게 내세우며, 글로벌 공조에 따른 자본과세와 같은 구체적 정책대안까지 내세웠다는 점은 ,피케티가 <21세기 자본론>을 수십년 만에 한 번씩 나오는 ‘대중에게 팔리는 정통 경제학 책’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해준 콘텐츠의 강점이다.
** <기획회의>에도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