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으로부터의 사색>저자인 신영복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방금 접했습니다.
제가 신영복 선생님의 이름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통해 접한 때는 대학에 처음 발을 디뎠던 1991년이었습니다. 그때 캠퍼스에는 민주화의 흥분과 좌절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흥분이 있었습니다. 1987년 민주화의 결과로 자유로운 의견이 넘쳐났습니다. 이전까지 금기였던 북한과 통일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났습니다. 사회과학 서적들이 학교 앞 서점에 넘쳐났습니다. 자발적인 세미나와 학회들은 수준 높은 글을 읽고 열띤 토론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좌절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시위 진압 방식은 여전히 가혹했고, 명지대 1학년생 강경대가 시위 중 전경의 구타 뒤 사망하면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정권에 대해 항의하는 이들이 연달아 분신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시인 김지하는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글을 쓰며 질타하기도 했습니다.
그 와중에 동구권과 소련은 완전히 무너진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이미 베를린 장벽은 무너져 있었고, 소비에트 연방은 형체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사회주의체제의 민낯이 만천하에 드러납니다.
혼란스러운 학생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중요한 사건이 생길 때마다 학생회나 학내 정치조직이 써붙이곤 하던 대자보는 슬슬 외면받기 시작했습니다. 대신 도서관에 앉아 공부하던 학생들이 노트를 찢어 펜으로 쓴 '소자보'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SNS로 벌어질 논쟁이 도서관 앞 벽에 붙고 또 붙어 있는 작은 종이쪽지들 안에서 벌어지곤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어떤 친구들은 사회과학을 더 깊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마음의 상처를 입고, 또는 외로워져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바로 그 즈음에 접했던 것이 신영복 선생님의 글이었습니다. '통일혁명당'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의 시국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갔다는 신 선생님의 글은, 그러나 전혀 무시무시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음을 다독이며 사색하게 하는 따뜻하고 깊은 우물과 같은 글이었습니다. 세상의 변화란 무시무시한 구호로부터가 아니라 깊은 사색과 따뜻한 감성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글이었습니다.
그리고 20년쯤이 지나서, 저는 신영복 선생님을 몇몇 자리에서 다시 만나뵈었습니다. 영광스럽게도 옆 자리에 앉아 있다가 신 선생님 바로 다음 시간에 강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회적경제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셔서 내심 고맙고 든든하게 느껴졌던 기억도 납니다.
그런데 정작 그 때, 신 선생님의 글이 제 대학생활의 출발점이 되다시피 했었다는 이야기를 해드리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이 영면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지금, 그 말씀 전해드리지 못한 게 너무나 아쉽고 슬픕니다. 세상에 다 때라는 것이 있는데, 때를 잡지 못한 것 같습니다. 눈물이 납니다.
오늘 뒤늦게나마 독백 형식으로 말씀드립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오래도록 평화로우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가장 긴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는 말씀, 늘 기억하겠습니다.
* 아래는 2010년에 신영복 선생님 강연을 듣고나서 쓴 글, '파워포인트 딜레마' 링크입니다.
* 2016년 1월 16일 페이스북 페이지 '이원재'(www.facebook.com/lee.wonjae.fb)에도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