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내 사무실로 세 명의 젊은이가 찾아왔다. ‘웃어밥’이라는 주먹밥집을 운영하는 청년들이었다. 쭈빗쭈빗 싸가지고 온 주먹밥을 꺼내면서 ‘정말 맛있는 주먹밥’이라고 소개했다. 자리에 앉은 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두 지방에서 대학을 나온 청년들이다. 그냥 취직에 매달리기는 싫었다. 흔히 말하는 ‘좋은 직장’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이기도 하지만, 남의 일을 하는 것보다 자기들의 일을 하고 싶었다.
소비자들이 모여 있는 것 같은 서울로 무작정 온 그들은 보증금 500만원짜리 방을 구했다. 그 방에서 매일 모여 어떤 사업을 할지 늘 같이 머리를 싸매고 궁리했다. 그러던 끝에 일단 각자 흩어져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하고 서울시내 식당으로 흩어져 일을 시작했다.
그 때 모은 푼돈으로 시작한 사업이 주먹밥이다. 대학가 길거리에서 1천원 짜리 주먹밥을 팔았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키 큰 청년 세 명이 하얀 셰프 옷을 걸치고 큰 소리로 인사를 하고 농담을 하기 시작했다. ‘주먹밥이 아니라 웃음을 파는 이들’로 자신들을 자리매김했다.
새벽잠은 더 많은 주먹밥과 바꿨다. 매일 인사를 외치느라 목이 쉬었다. 간신히 판매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첫 3개월. 신나게 팔고 나서 정산해 보니 한 달에 1인당 30만원밖에 돌아가지 않았다.
웃어밥은 그 고생을 몇 년 이어간 끝에 서울시내 매장이 두 개 있는 어엿한 주먹밥 식당이 됐다고 그들은 웃으며 말했다.
그 청년들이 보여준 게 기업가정신이다.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좋은 제품을 만들어내고 소비자들을 설득할 방법을 찾아내어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 그런 삶을 지향하는 것. 그런 삶을 이어가기 위해 끊임없이 혁신하는 것.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자본주의를 구할까>의 저자 존 호프 브라이언트는 바로 그런 기업가정신이 오늘날 미국이 겪고 있는 빈곤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런 기업가정신을 살리기 위해 미국을 새롭게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웃어밥’의 청년들이 걷는 길은 쉬운 길이 아니다. 이미 사회는 굳어질 대로 굳어져 있다. 새로운 아이디어만으로 단단한 시장에 진입해 자리잡기는 만만한 일이 아니다.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우리에게 이미 짙게 드리워진 세습자본주의의 그늘 탓이다.
기업가정신이 발휘되기 어려운 사회가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는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론>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세습자본주의’라는 용어를 내놓으면서 전세계 출판시장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폴 크루그먼, 조지프 스티글리츠 등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이 잇따라 극찬하기도 했다.
피케티는 이 책에서 자본주의가 지금처럼 진행되다가는 자본 소유의 집중도가 점점 더 높아져서 ‘세습자본주의’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 이야기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가 개인이 능력과 노력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라는 오랜 믿음을 깨뜨린다.
피케티의 분석에 따르면 현재 전세계적으로 자본은 점점 더 소수의 손에 집중되고 있으며, ‘돈이 돈을 버는’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즉 일해서 버는 소득에 견줘 자본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저절로 생기는 소득의 비중이 점점 더 커진다. 이렇게 되면 자본을 소유한 부자들이 더 많이 저축하면서 자본은 더 크게 늘어나며 불평등이 세습되는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처음부터 자본을 세습받지 않은 이들은 기회 자체를 찾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한국을 포함해 대부분 선진국에서 이미 빈곤은 기회의 문제다. 하루 세 끼를 먹고 살 수 없는 문제보다는 계층 상승의 기회가 차단되어 있다는 문제가 더욱 크다.
흔히 절대적 빈곤은 절대적으로 소득이 부족한 상태를, 상대적 빈곤은 격차가 커서 상실감이 큰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제는 절대적이냐 상대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노력하면 변화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느냐를 기준으로 빈곤을 판단하는 게 옳다.
이 책의 저자는 ‘빈곤은 기회와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내세운다. 따라서 빈곤의 해소도 빈곤층에게 능력과 기회를 주는 것으로 시작하는 게 맞다는 접근법이다. 공감이 가는 관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빈곤을 극복하는 전략으로 옮겨가 보자. 존 브라이언트가 제시하는 과거 사례를 짚어보면 그 전략의 모양새가 짐작된다.
미국 흑인인권운동의 아버지인 마틴 루서 킹 목사를 보자. 그는 마음을 울리는 명연설과 가두시위로 유명하지만, 실은 적극적으로 시장과 비즈니스를 이용한다.
킹 목사가 지역을 방문해 대중연설을 하고 가두시위를 벌일 때, 그의 친구 앤드류 영은 시위에 참여하는 대신 지역의 사업가들을 찾아가곤 했다. 그리고 차별을 없애는 것이 왜 비즈니스에 도움이 되는지를 차분하게 설득했다.
논리는 명쾌했다. “흑인들도 중요한 소비자다. 구매력은 점점 커지고 있다. 그들의 의식수준이 높아지고 있다. 이대로 가면 중요한 소비자층을 쫓아내고 마는 것이다.” 시장과 소비자의 힘을 활용한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백인전용’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던 울월스의 푸드코트 등 다양한 상점에서 먼저 인종차별이 사라졌다. 정부가 제도를 통해 따라간 것은 그보다 한참 뒤의 일이다.
저자는 자동차의 아버지 헨리 포드가 무엇을 했는지도 살펴본다. 그는 값싼 자동차를 대량생산하는 한편, 자동차공장 노동자들에게 고임금을 지급했다. 대부분 노동자들이 빈곤에 시달리던 시기였다. 노동자가 자신이 만든 자동차를 살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결국 포드자동차의 노동자들이 강력한 소비자층으로 일어서면서 포드자동차 뿐 아니라 그 기업이 있던 도시 디트로이트의 번영이 시작됐다.
이 사례로부터 우리는 두 가지를 깨닫게 된다.
첫째,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비즈니스와 시장의 힘을 활용할 수 있다. 사회적 기업가정신으로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다.
둘째, 빈곤을 해결하는 데 비즈니스가 해야 할 몫이 있다. 기업가정신은 이런 사회적 책임을 포괄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전문가들은 ‘피라미드 맨 아래의 부’(Base of the Pyramid)라고 부른다. 기업들이 빈곤층을 적극 공략해야 미래 성장 동력이 생긴다는 이야기다. 미국 미시간대 프라할라드 교수 등이 주창한 이론이다.
피케티가 이야기한 세습자본주의는 견고해 보인다. 어디서부터 뚫고 들어가야 할지 곤란하다. 피케티는 전세계 국가들이 공조해 자본세를 도입하자고 하지만, 그야말로 먼 이야기다.
이런 가운데 저자가 이야기하는 ‘기업가정신’이 눈에 띈다. 어쩌면 ‘세습자본주의’라는 바위 전체를 한꺼번에 깨뜨리지는 못할지언정, 여러 군데에 작은 균열을 낼 수 있는 송곳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하게 된다. 역사의 중요한 변화는 늘 전체를 포괄하는 이론으로부터 나온 게 아니라 명확하고 날카로운 실천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금융의 중요성 역시 한국적 맥락에서도 강조되어야 한다. 과거 한국의 은행은 수출기업에게 자금을 대주는 역할을 주로 했다. 지금 한국의 은행은 집 사는 사람에게 대출해주는 일을 주로 한다.
하지만 실은 금융이 정말로 해야 할 역할은 기업가들이 실험하고 실패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일이다. 창업과 중소기업을 위한 금융, 특히 실패해도 패가망신하지 않도록 위험을 덜어주는 금융체계가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
다만 저자가 미국의 빈곤을 배경으로 글을 쓰고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하면서 읽을 필요가 있겠다.
미국경제와 한국경제의 결정적 차이점은 미국은 내수 중심 경제이고 한국은 수출 중심 경제라는 데 있다. 즉 한국경제의 중요한 소비자들은 외국에 있다. 국내에서는 늘 지나친 경쟁으로 고통스럽다. 자영업 창업은 너무 많아 문제고 늘 소비자가 너무 적어 문제다. 시장이 너무 좁다.
따라서 한국에서 기업가정신을 북돋울 때는 국내시장만을 염두에 두어서는 곤란하다. 어떻게든 외국시장을 염두에 두는 게 맞다.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수출 중심으로 편제되어 있는 경제구조를 바꿀 필요가 있다. 수출중심 성장에서 소득중심 성장으로 중심축을 옮겨야 소비자들에게 힘이 생긴다. 수출은 자본 축적에는 유리하지만 소비자들에게는 불리하다. 임금이 오르고 분배구조가 좀더 균등해져야 소비자에게 힘이 생긴다. 그래야 국내에서도 기업가정신을 펼치라고 마음놓고 이야기해 줄 수 있게 된다.
또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점은 주택담보대출에 대해 저자가 언급한 부분이다. 저자는 저소득층이 내집마련의 꿈을 갖도록 건전한 대출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적 현실에서는 맞을 수도 있다. 유색인종 빈곤층 상당수가 여전히 은행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으며, 기축통화인 달러를 통해 세계 금융을 지배하고 있으니 말이다. 환율과 금리를 조정하면서 언제든 빚을 털어버릴 수 있는 나라가 미국이다.
한국은 다르다. 이 나라에서 내집마련이 정상적 꿈인 시절은 지나가 버렸다. 주택가격은 한국 평균 소득을 버는 사람은 구매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뛰어올라 버렸다. 빚을 내서 사들였다가는 그 빚을 갚는 데 평생을 보내야 한다.
경제 전체적으로도 가계대출 규모가 지나치게 큰 상태라 주택담보대출을 더 늘리면 국가경제에 위험이 올 수도 있다. 국가경제가 위험해져서 금리라도 뛰어오르는 날에는 장기채무를 가진 사람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주택담보대출을 늘리는 정책방향은 현실에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기업가정신과 기회의 평등에 초점을 맞추어 읽는다면 이 책은 여전히 한국 상황에서 반드시 필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웃어밥’의 청년들은 이제 지역공동체에 기여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수줍게 말했다. 이 책은 그들의 기업가정신을 응원하는 책이다. 그리고 그 응원에 가치를 더하려면 그에 맞게 사회환경이 바뀌어야 한다.
기업가정신에 삶을 건 이들의 웃음이 이어져야 한다. 그게 세습자본주의를 향해 가고 있는 우리 사회에 남은 미래다.
* 이 글은 단행본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본주의> 감수의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