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에서 지속가능성으로 : 세월호 참사 이후 돌아본 한국경제 패러다임[1]
이원재(희망제작소 소장)
1. 지금 패러다임 전환을 이야기하는 이유
세월호 사건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특별조사위원회는 여전히 갈등 중이다. 조사위 규모를 축소하는 시행령이 나오면서 실제 조사를 해낼 수 있을지 여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유가족들은 거리로 나섰다.
현안이 진행 중인 사안에 대해 ‘패러다임 변화’를 논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패러다임’란 이 사건을 가져온 사회 전체의 상식, 그리고 이 사건이 앞으로 가져올 사회 전체의 상식을 뜻한다. 즉 중장기적 영향이다. 절박한 단기적 현안이 있는 상황에서 중장기적 영향을 논하는 일은 시급하지 않은 일로 여겨질 수 있다.
특히 진상이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 사건을 경제패러다임 변화와 직접 연결짓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다. 불명확하거나 잘못 밝혀진 사건 경위를 사실이라고 착각하고는 패러다임과 연결짓는 실수가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 이 시점에서 그 연결점을 애써 찾아 이야기하려는 이유는 2011년 일본 동일본대지진과 쓰나미 사건을 <리쿠젠타카타, 2014년>라는 필름에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미나 손과 나누었던 짧은 대화의 기억에 있다.
“참사를 겪은 사람들은 다시 삶을 살아내기 위해 어떤 도움이 필요하다고 이야기를 하던가요?”
내 질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했다.
“두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에게 진짜로 벌어진 일을 밝혀 세상에 들려 주세요.’ ‘우리가 겪은 비극으로부터 사회가 뭔가를 배우면 좋겠습니다.’”
그는 지진 당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도시 중 하나였던 리쿠젠타카타를 찾아가 희생자 유가족들을 한 명 한 명 만나면서 그들의 현실과 염원을 화면으로 재구성했다.
피해자들은 여전히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자신들이 겪는 고통이 헛된 것이 아니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그 고통으로부터 사회가 무언가를 배우고 한 걸음 나가야 치유가 시작될 것 같았다.
동일본 대지진이 덮친 도호쿠 지역은 여전히 상처투성이다. 남은 이들에게는 일상이 고통의 쓰나미다.
재난 3년이 지난 시점까지 27만명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고, 10만명이 임시주거시설에서 살고 있었다. 사람들이 속속 떠나면서 인구가 30%나 줄어든 마을이 수두룩했다. 경제 기반은 무너졌고 공동체도 파괴된 곳이 부지기수다.
하지만 문제에 대응하는 패러다임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일본중앙은행과 공적연금은 경제활성화 방안으로 양적완화 추가 확대와 주식투자 확대 방안을 내놓는다. 금융완화다. 그 상당부분은 수출 대기업을 살리려는 환율 절하를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일본 정부는 5년 동안 250조원을 재해 복구에 쓰겠다고 공언했다. 재정투입이다. 상당부분은 결과적으로 건설공사 등 하드웨어에 투입된다.
쓰나미가 덮쳤던 해안에는 최고 높이 14.7미터, 폭 80미터의 거대한 방조제를 건설하려 한다. 계획대로라면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가 동일본 해안에 죽 늘어선다. 원전 주변에서는 지표면의 흙을 모두 걷어내는 거대한 작업이 진행 중이다. 모두 초대형 건설 계획이다.
후쿠시마 해변의 항구에는 쓸려갔던 건물들이 잇따라 지어지며 조업을 재촉하고 있다. 하지만 후쿠시마산 해산물은 팔리지 않는다.
어선들은 일주일에 한 차례만 출항한다. 그래야 지원금을 받을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쓰나미 피해지역 주민 10만여명은 여전히 임시주거시설에 산다. 건물은 돌아왔지만 사업도 사람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대형건설사업이 단기적으로 노동자와 장비를 고용하고 돈을 푸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속가능하고 장기적인 대책은 될 수 없다. 건설공사가 끝나면 다시 실업과 빈곤이 그 지역을 덮칠 것이다. 거대한 고통에도 일본 정부는 은근슬쩍 원전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에너지정책을 끌고 간다.
일본은 대재난 이후에도 패러다임을 바꾸지 못했다. 그들의 고통이 헛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유족들의 목소리와는 반대 방향이다. 재난으로부터 배우지 못한 사회, 미래 세대가 겪을 문제를 과거 패러다임으로 대응하는 사회는 파국을 겪을지도 모른다.
세월호 사건의 진상규명이 마무리되지 않았는데도 경제패러다임을 서둘러 논하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 이유가 여기 있다. 이 비극적 사건 앞에서 한국경제 패러다임을 돌아보고 미래 세대에게 맞는 패러다임을 재설계하는 일은 그들의 고통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다만 서두에 밝힌 것처럼 세월호 사건의 진상은 여전히 규명 과정이 진행중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현재 한국경제를 주도하는 패러다임이 미래 세대가 맞이할 사회와 어떻게 갈등을 일으키는지를 짚어보고, 미래 세대를 위한 경제패러다임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총론적, 기초적 수준에서 짚어 보고자 한다.
2. 사고의 원인: 악마 또는 패러다임
1년에 내항여객선의 여객은 1천만명으로 추정된다. 1970년의 남영호, 1993년의 서해훼리호 사건을 상기하며 20년마다 여객선 대형인명사고가 난다고 보고, 세월호 탑승자를 443명으로 봤을 때, 출항 때 유사한 사건이 벌어질 확률은 0.0002%이다.[2]
이렇게 보면, 질문을 이렇게 단순화할 수 있다. “한국사회는 0.0002%의 인명사고 가능성을 막기 위해 자원을 투입할 수 있는 사회인가?”
세월호 사건의 원인은 여러 가지로 지목되지만, 대체로 선박의 문제, 운항의 문제, 구조과정의 문제로 정리해볼 수 있다.
선박의 문제 중에는 선령의 문제로 이어진다. 과거 정권의 선령규제완화로 세월호가 도입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또한 국제기준을 지키지 않은 증개축이 일어났다는 문제도 지적된다.
운항의 문제는 화물과적, 평형수 배출 등 매출을 늘리기 위해 안전관련 규정을 무시하고 보고 내용을 조작했다는 문제 등으로 구성된다.
구조과정의 문제에는 선장과 선원들이 승객의 안전보다는 자신들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했다는 내용이 포함된다. 또 해경이 신속하게 구조에 나서지 않았으며 퇴선명령 등에 소극적이었다는 이슈도 여기 포괄된다.
세월호 사건 이후 한국사회에는 두 종류의 ‘악마’ 프레임이 나타났다.
첫 번째 ‘악마’는 유병언 세모그룹 창업자와 이준석 세월호 선장이다. 수사당국은 사건 이후 유병언 창업자의 신병을 확보하는 데 집중했고, 언론은 그 과정을 지상중계했다. 이준석 선장은 승객들을 두고 먼저 탈출했다는 데서 국민적 비판의 대상이 됐다. 이 선장에게는 사형이 구형됐고 징역 36년형이 선고됐다. 애초부터 악한 이들 탓에 이 모든 문제가 불거졌다는 논의다.
두 번째 ‘악마’는 신자유주의와 비정규직이다. 선원 중 다수가 비정규직이며, 선장 월급 270만원, 3등 항해사 170만원과 같은 열악한 근로조건으로부터 안전불감증과 구조에서의 소극성을 지적하는 논의가 있었다. 이준석 선장도 재판에서 자신을 '힘없는 계약직 임시선장'쯤으로 표현했다. 취약한 처지 탓에 안전보다 단기적 이윤극대화를 중시하는 회사 쪽 논리를 거부할 수 없었고 사명감을 가질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 논의들을 지켜보며 내게 계속 떠오르는 질문이 있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결정적인 순간 어떻게 행동했을까?
마지막까지 배에 남아 최후를 맞는 영화 속 선장이 될 수는 없다면, 나보다 승객 목숨을 먼저 생각해 탈출시키는 영웅적 선원이 될 수는 없다면, 최소한 희박한 확률의 대형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회사 이익을 희생하도록 만드는 사장이나 직원은 될 수 있었을까?
그것조차도 쉽지는 않았으리라는 게 나의 솔직하고 좌절스러운 답이었다. 여전히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은 ‘먹고사니즘’이다. 안전이나 직업윤리보다는 속도와 회사 이익과 생존이라는 가치에 우선순위가 있다. 이를 거슬러 행동하려면 영웅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순응해도 문제는 있다. 운이 없으면 대형사고를 만나 순식간에 악마가 될 수 있다.
영웅만이 참사를 막을 수 있는 사회는 정상인가? 평범한 사람이 평범한 행동만 해도 악마가 될 위험에 빠지는 사회는 정상인가? 아니다. 영웅 없이도 평온한 일상이 가능한 사회, 악마조차도 규칙을 지키며 살게 되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평균적 개인이 특정한 위험 상황에서 안전지향적으로 행동하도록 만드는 것, 그리고 그 처지가 비정규직이든 정규직이든 고임금이든 저임금이든 관계 없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게 바로 그 사회의 규칙이다.
결국 이 논의는 특정한 개인이나 시스템 전체를 추상적으로 악마화하는 논의보다는, 아주 낮은 확률의 인명피해 가능성을 막기 위해 자원을 투입하는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무엇인지를 따지는 논의로 이어지는 것이 맞다. 예를 들어 선원들이 최소한 규정에 정해진 대로 구조훈련을 정기적으로 받도록 하는 조건이나, 과적 등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도록 만드는 조건이나, 안전과 이윤이 충돌할 때 안전을 먼저 생각하며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게 만드는 조건을 논하는 것이 맞다는 이야기다.
그 조건이 바로 패러다임이다.
3. ‘먹고사니즘’의 시대를 지나며
토머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처음으로 제안한 ‘패러다임’이란 이론이나 방법, 문제의식 등의 체계를 뜻한다. 예를 들면 과학에서라면 ‘천동설’에 관한 것. 예를 들어, 화성과 같은 외행성은 천구를 지나는 특정 기간에 정상적인 공전 방향과는 반대로 역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기원전 3세기 무렵 고대 그리스 때부터 잘 알려져 있었고, 천동설에 부합하는 설명을 하기 위해 주전원과 이심원을 갖는 천체 모형을 고안하게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모형은 이를 정교하게 설명하고 있다. 사회학적 패러다임은 “어느 주어진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에 의해 공유되는 신념, 가치, 기술 등을 망라한 총체적 집합”을 말하는 “집단 공약의 집합으로서의 패러다임”이다.
생활인 수준에서 패러다임 변화란 ‘상식의 변화’를 뜻한다. 예를 들어 세월호 사건 이후 벌어졌던 ‘비정규직 논란’도 한국사회의 기존 패러다임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비정규직이라면 안전 문제에 대해 둔감한 것이 한국사회의 상식인가? 처지가 열악한 노동자는 타인을 위험으로부터 구조하거나 그 위험을 예방하는 데 소극적인 게 상식인가?
이런 사고방식은 당사자들로부터 나온 정교한 ‘사실’이라기보다는, 관찰자들의 합리적 ‘추론’에 가깝다. 이런 추측이 상식적인 것으로 언론과 지식인들에게까지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이야말로 패러다임이다.
근로조건과 업무에 대한 사명감 사이에는 관련성이 있을 수도 있지만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을 구할 것인가 버려둘 것인가 하는 절박한 문제에 부딪혔을 때 의사결정에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비정규직 직원이면서도, 구명조끼를 학생들에게 양보하고 사망한 박지영씨의 경우를 봐도 그렇다.
패러다임이란,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한 평균적인 시민이 ‘기업 이익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안전’에 반하는 의사결정을 요구받았을 때, 거부할 수 없게 만들거나 거부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집단적 생각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국사회에서는 비정규직과 안전 관련 이사결정을 연결짓는 이야기가 ‘상식’ 즉 ‘패러다임’으로 받아들여진다. 여전히 한국사회는 속도와 이윤을 다른 모든 가치와 환원가능하며 신성한 가치로 여기는 ‘먹고사니즘’ 패러다임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자신의 경제적 이익과 안전과 같은 다른 가치를 기꺼이 교환할 것이라는 논리가 내면에 깔려 있는 것이다.
거꾸로 이런 패러다임이 다시 개인들에게는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정서를 갖고 경제적 이익과 안전을 교환하는 의사결정을 정당화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먹고사니즘’ 패러다임은 ‘먹고 사는 문제가 우선 해결되어야 다른 생각을 해볼 수 있다’는 한 마디 안에 아축된다. 불평등 앞에서도, 인권 앞에서도, 복지 앞에서도 이 한 마디는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새로운 사회적 과제가 당장 벌어서 먹고 살아야 한다는 ‘먹고사니즘’ 앞에서 힘을 잃고 마는 순간이다.
과거에 이런 ‘먹고사니즘’ 담론은 아마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삶의 방식에서 나왔던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이 담론은 덩치를 키웠다. 연간 매출 100조원, 200조원이나 되는 기업과 산업을 걱정해주는 것으로 진화했다. 예를 들면 ‘환율 때문에 삼성전자 현대자동차도 어려운데’ 어떻게 다른 걱정을 할 수 있느냐는 식으로 말이다. 좀 더 나아가면 신수종 사업에 대한 걱정까지 이어진다. 10년 뒤에는 지금 잘 나가는 산업이 모두 사양산업일 텐데, 그 때 뭘 먹고 살 지를 걱정하기도 바쁘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다른 사회적 과제에 신경 쓸 틈이 없기 마련이다.
‘한국사회 구성원에 의해 공유되는 신념, 가치, 기술 등을 망라한 총체적 집합’, 즉 한국사회 패러다임은 ‘먹고사니즘’이었던 것이다.
4. 아버지 나라와 아들의 나라
한국사회는 인구구조와 학력의 변화로 엄청난 변화 과정을 겪고 있는 중이다. 현재의 경제 패러다임은 미래 세대가 겪을 현실을 지탱하기 어렵다. 세월호 사건을 겪은 1997년생, 19세인 사람들이 앞으로 겪어야 할 경제는 이전 세대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며, 새로운 세대를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세월호 세대보다 대한민국을 앞서 살고 있는 1955~1963년생 베이비부머 세대를 떠올려 보자. 이 세대의 나라는 ‘성장’이라는 한 마디로 요약되는 시대였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이 지배하는 시대였다. 미국 대학 경제학 박사의 말이 국민 모두의 진리처럼 받아들여지던 시대였다. 경제성장은 항상 옳으며, 내집마련이 인생역전을 가능하게 해주는 모두의 경제적 목표가 되어야 했고, 부자가 되려면 공유과 평등의식은 내던져야 한다고 믿던 시대였다.
‘아파트’는 이 세대를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코드[3]다. 아파트 신화는 지금의 기성세대 내면에 들어앉은 오랜 도그마다. 그럴 법도 하다.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는 무일푼으로 사회에 던져진 개인이 안정적인 중산층에 진입하는 지렛대 역할을 꾸준히 했다. 월급을 모아 아파트를 사는 일은 한국 어른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입증하는 일반적 경로였다. 그 세대에게 아파트가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4·19 세대는 20대에 4·19혁명을 겪으며 거리에 나섰지만, 이어 여의도와 강남 개발의 수혜자가 되기도 했다. 20대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영구집권 체제를 구축하는 장면을 목격한 유신 세대가 중견 회사원이 될 때쯤에는, 군사정권의 주택 500만호 건설 정책과 함께 과천, 개포, 목동, 상계 신시가지에 아파트가 올라왔다. 1987년의 민주화는 이들에게 이중의 축복이었다. 3저 호황을 업고 강남과 신시가지 아파트 값이 3~4년 만에 두세배씩 뛰었다. 386세대는 분당, 일산, 평촌 등에 새로 지어지는 아파트 숲에 한 칸씩을 차지할 수 있었다. 노태우 정부의 주택 200만호 건설 정책도 큰 힘이 됐다. 아파트는 이들 중 상당수를 중산층으로 밀어올렸다.
한국의 기성세대에게 아파트는 복지였다. 월급 안정적으로 받는 직장만 들어가면, 분양가 상한제와 청약통장 제도와 저금리 대출을 이용해 싸게 산 뒤 비싸게 팔아 노후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아파트는 경제 교육의 산실이기도 했다. 빚과 전세금을 끼고 한 채 값으로 여러 채를 소유하는 자본주의의 레버리지를 배웠다.
그 시절 아파트는 낙수효과의 통로이기도 했다. 아파트가 무언가를 생산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얻은 모든 것은 수출 제조업 중심 고도성장의 과실로부터 흘러내려온 낙수였다. 광고에 목마른 언론도 복지정책 없는 정부도 그 물에 기꺼이 영혼을 담갔다.
이 세대에게 아파트는 분배정책이고 복지정책이었다.
세월호 세대, 아들이 겪을 나라는 전혀 다르다. 성장률은 낮아졌고, 집은 재산이 아니라 짐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고, 부자가 되는 길은 부모를 잘 만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잘 보이지 않는다.
사실 아들의 나라 한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산업화에 성공한 가장 모범적인 사례다. 1인당 국민소득이 50여 년만에 수십 배로 늘어났고, 1차 산업 이외에는 산업이라고는 찾기 어렵던 나라에서 전자 자동차 철강 등 주요 제조업 분야에서 글로벌 기업을 갖춘 나라로 성장했다. 최근 20년만 해도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이던 것이 3만 달러에 육박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산업화의 과제는 거의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왜 미래 세대는 이렇게 불안에 시달려야 하나? 먹고 살 것이 부족해서인가? 여전히 산업화가 문제인가?
하루벌어 하루 먹던 시절, 오로지 내일의 벌이만이 문제이던 시대에도 경제가 걱정이었다. 그런데 매출 200조 원짜리 기업이 현재도 여전히 경제는 문제다. 이 걱정은 언제면 끝나게 될 것인가? 언제쯤이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다른 문제를 생각할 수 있게 될까? 우리는 어쩌면 전혀 잘못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실은 산업화의 과제가 모두 달성되고도, 우리에게 채워지지 않는 어떤 종류의 허기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이제는 평균소득과 총량을 높이고 속도를 키우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 필요한 지를 찾아내는 것이 과제다.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우리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때다.
예를 들어 세월호 사건의 맥락에서 패러다임 전환이란, 발생가능성이 아주 낮은 안전사고를 회피하기 위해 현재의 비용을 감수하는 방향으로 의사결정 패턴을 바꾸는 것이다. 이런 새로운 패턴이 선박회사의 의사결정, 관계당국의 의사결정, 상황을 맞닥뜨린 개인의 의사결정에 모두 스며들게 되는 것이다.
이를 한국경제 전반으로 확장하자면, 산업화 이후에 이뤄야 할 ‘다른 어떤 것’을 찾아내고, 그 가치를 중심으로 ‘먹고사니즘’을 대체할 다른 과제를 구성해 내는 일이 바로 패러다임 전환이다.
자산가치는 상승하지 않고, 사상 최고의 학력을 자랑하며,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문화적으로나 기술접근성으로나 가장 동질적인 세대가 될 지금의 19세들에게는 아버지 세대와 전혀 다른 패러다임의 경제가 필요하다.
5. 깨어진 약속, 불행한 세대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에 육박하는 시대에 경제적 불안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1만 달러 시대나 1천 달러 시대에 살던 사람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취업준비생들이 서울 노량진의 고시촌으로 몰려들고, 벤처기업은 고사하고 글로벌 대기업조차 사양하며 공무원시험과 공기업 취업을 지향하는 모습은 충격적이다.
하지만 시각을 바꾸어 지금 청소년과 청년의 눈으로 보면 매우 당연한 일이다. 이들 입장에서 보면 최근 몇 년 동안 중요한 약속이 여러 개 깨어졌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을 전망이다.
우선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 가면 좋은 일자리와 좋은 삶이 기다린다’는 약속이 깨어졌다. 2015년 3월 현재 청년실업률은 IMF구제금융 시절만큼이나 높다. 대학진학률이 80%에 육박하는 시대의 그늘이다.
또 ‘괜찮은 직장에 취직해서 열심히 일하면 집도 장만하고 생계도 꾸려갈 수 있다’는 약속도 깨어졌다. 평균적 월급생활자가 주택을 구입하는 일은 이제 꿈꾸기 어려운 일이 됐다. 자산가격 상승기도 지나서, 무리하게 빚을 내 주택을 구매하더라도 빚더미에만 올라앉을 가능성이 높다. 소득이 있는 사람 중 절반 이상이 월 200만원 미만의 소득을 벌어들이고 있다. 정상적인 도시 생활이 쉽지 않은 액수다.
여기다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노후는 누군가 보살펴 줄 것’이라는 약속도 깨어졌다. 저출산 고령화로 인구구조는 역삼각형 형태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 현재 생산인구 5명 가량이 노인 1명을 부양 중인데, 2050년이 되면 1.4명이 1명을 부양해야 할 전망이다. 자식세대가 부모를 부양하는 가족공동체 시스템도 과거와 달리 급격하게 해체 중이다. 청년세대가 노년에 접어들 때쯤이면 가족의 보호도 연금의 보호도 버거워질지 모른다.
고등학교 때까지 입시지옥을 잘 참아내고 대학만 가면 광명의 길이 열린다고 믿었지만 그 약속은 깨어졌다. 대학생들은 다시 입사지옥으로 향한다. 대학 시절 청춘을 반납하고 영어공부와 학점따기에 매진하고 취직하면 자유의 몸이 된다고 믿었지만 그 약속은 깨어진다. 비정규직 처지라 늘 불안하고, 정규직에 진입해도 곧 정년을 맞는다는 사실에 불안하고, 직장을 벗어나면 나를 의지할 곳이 없다는 데 절망하고, 노인이 되면 병들고 가난에 찌든 비참한 삶을 살게 될 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희망 없는 미래의 공포에 시달린다. 깨어진 약속이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6. 새로운 약속
깨어진 약속의 문제는 그릇된 약속으로부터 출발한다. 그 약속이 바로 패러다임이다. 패러다임은 사회 전체가 특정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가 달성될 때 돌아올 삶의 혜택에 대해 특정한 기대를 개인들이 갖도록 유도한다. ‘먹고사니즘’은 끊임없는 개인이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기만 하면 자산축적을 통해 미래에 대한 불안을 해소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도록 한다. 그리고 세대가 지나면서 축적된 자산의 크기는 점점 더 커질 것이라는 기대를 준다. 그 기대를 채우지 못할 때, 즉 축적할 수 없거나 더 커지지 않을 때 좌절은 매우 크다. 경제성장률이 낮아지면서, 즉 사회 전체의 속도가 느려지면서 그 불만은 더 커진다.
그 좌절과 불만이 감당하기 어려워질 만큼 커지기 전에, 새로운 패러다임, 새로운 약속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다음은 몇 가지 가능성들이다.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지속가능성이란 경제, 사회, 환경의 세 가지 영역을 균형 있게 발전시키는 새로운 성장 모델이다.
실제로 우리 삶은 그 세 가지 영역의 균형 아래 지속된다. 경제적인 수입도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아무리 경제적으로 부유해도 빈부격차, 인권침해, 부패 등의 문제 때문에 사회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은 상황이 되면 삶은 지속될 수도 성장할 수도 없다. 또 지구환경이 파괴되어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이 사라진다면 당연히 우리 모두의 삶은 종말을 맞는다.
문제는 이 세 가지 영역 사이에 긴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사회문제가 악화되거나 환경이 파괴되는 장면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목격했다. 그런 긴장과 갈등을 균형 있게 조정하면서, 세 영역 중 어느 것도 파괴되지 않으면서 전체가 진보하도록 조율하는 것이 정치와 시민사회의 역할이다.
이 개념을 경제주체별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기업 수준에서는 ‘지속가능경영’ 또는 ‘사회책임경영’이 경영의 핵심 패러다임이 된다. 가계 수준에서는 ‘지속가능한 소비’ 또는 ‘윤리적 소비’가 소비의 핵심 패러다임이 된다. 정부 수준에서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국정목표로 삼는 정책패러다임이 된다.
멤버십 사회(Membership Society)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2005년 1월 20일 취임식에서 국내정책의 키워드로 ‘오너십 사회’(ownership society)를 내세웠다. 오너십 사회는 '개인들이 자신의 힘으로 가진 것을 더 늘리는 사회'를 뜻한다. 한 마디로 미국 국민들이 각자 집과 주식을 소유하면 미국에 번영과 안정을 가져다 준다는 논리다.
부시 대통령의 오너십 사회는 결국 대출 확대를 통한 주택보유율 증가로 이어졌고, 이후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파동으로 이어졌다. 이 때 생긴 금융위기로 미국인들의 주식자산의 가치도 떨어졌다. 오너십 사회의 꿈은 결국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오너십 사회는 자산보유와 축적을 경제적 삶의 핵심 성과지표로 삼는다는 데서 주요한 경제패러다임을 구성한다. 1980년대 초부터 영미권에서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하는 기업에서의 주주가치 지상주의도 넓은 의미에서 여기에 포괄된다. 그리고 그 원리를 한국사회는 1990년대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현재는 ‘내집마련’과 ‘주주가치’라는 말로 대표되는 경제의 기본 원리로 자리잡은 상태다.
한국사회는 유통기한이 지난 오너십 사회의 자리를 ‘멤버십 사회’의 원리로 대체하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자산의 보유보다는 자산의 활동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즉 스톡보다는 플로우를 중심에 놓는 경제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또한 자본제공자보다 노동 등의 서비스 제공자를 중심으로 한 경제 조직을 더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협동조합이나 사회적기업 등이 그런 성격을 띠고 있는 조직이다. 그 원리를 경제 전체로 확장할 수 있겠다는 의미다.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
성장이냐 분배냐를 따지는 해묵은 논쟁은 일단락되는 듯하다. 많은 경제전문가들이 이제 분배를 이야기한다. 성장하기 위해서라도 분배가 중요한 국면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는 사실 가계소득 성장률이 경제성장률을 따라잡지 못하고, 중하위 임금소득자들의 실질임금이 제자리에 머무는 현상이 몇 년째 이어지면서 사회적 공감대가 이뤄진 방향이기도 하다.
나는 한국사회의 논의가 여기서 ‘불평등’에 대한 것으로 한 걸음 더 나가면 좋겠다. 지금 분배가 문제인 까닭은 단지 나누어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올바르게 나누어지지 않아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성장도 재분배도 위협받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분배문제를 걱정하는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미래세대를 걱정한다. 치솟는 청년실업을 걱정하고 고시촌의 취업준비생 인파를 걱정한다. 그런데 공공기관, 공기업, 대기업에만 몰리고, 이런 곳에 취업되지 않으면 취업준비생 노릇을 마다하지 않는 청년들의 선택에는 어느 정도의 합리성이 있다. 노동시장에서 같은 능력으로 같은 노력을 하면 비슷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상식이 깨어진 데 대한 반응이라는 점에서다.
한국사회는 성 안 사람과 성 밖 사람으로 나뉜다. 한 번 성 밖에서 시작하면 성 안 진입은 불가능하다.
같은 능력으로 같은 기여를 해도 대기업 소속이냐 중소기업 소속이냐에 따라 임금이 현저하게 다르다. 시험 한번 잘 봐서 공무원이나 공기업 직원이 되면 안정된 임금과 연금까지 보장받는데, 정부 일을 위탁받아 수행하는 비영리기관이나 사회적기업 임직원은 현장을 누비며 고생해도 저임금과 불안정성에 시달린다. 똑같이 사업아이디어를 가지고 투자자를 찾아 다녀도, 대기업 다니다 나온 사람과 그렇지 않고 처음부터 창업한 사람은 전혀 다른 대우를 받는다. 한 분야 전문성을 아무리 갈고 닦아도 대학교수 자리를 꿰차지 못한다면 낮은 강사료와 연구비를 견뎌야 한다.
이런 사회에서 청년들이 안전한 성벽 안에 숨고 싶어하는 것을 탓하기는 어렵다.
불안한 성 안 사람들은 성벽을 점점 더 높게 치려고만 노력한다. 청년들을 걱정하던 이들이 슬그머니 정년연장 구호 뒤에 숨고, 상위 10% 소득자들까지 부자증세 구호 뒤에 숨어 고용안정만을 외치며, 기업들은 글로벌 경쟁을 탓하며 채용을 꺼린다. 괜찮은 직장에 진입조차 어려운 청년들은 어쩌면 좋을지 알 수가 없다.
지금 청년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평등지향적인 세대일 수 밖에 없다. 7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고, 대부분 청년기 이전에 도시 생활을 경험하며, 인터넷과 스마트폰 보급으로 누구나 원하는 지식을 찾을 수 있는 세대다. 1960년대 전후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만 해도, 대학진학률이 20%대에 불과하며 도시와 농촌으로 여전히 나뉘어 있었다. 그 때와 견주면 세대 내 지식격차는 크게 줄었다.
모두가 비슷한 자격의식을 갖게 된 새로운 세대에게, ‘공정한 게임의 룰’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기여하는 이들은 보상을 받아야 하고, 가진 지위 때문에 기여와 상관없이 더 큰 보상을 받는 구조가 있다면 깨어져야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능력주의(meritocracy)의 복원이다.
다만 다음 세대의 능력주의는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가질 것이다. 단순히 경제적 성과에 대해 많이 기여하는 이들에게 더 많은 보상을 줘야 한다는 의미를 뛰어넘어, 경제 사회 환경을 포괄하는 지속가능성의 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하는 이들에게 더 보상해야 한다는 좀 더 복잡한 의미를 띄게 될 것이다. 이에 걸맞은 측정과 보상시스템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1] 이 글은 2015년 4월 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1년, 우리들의 새로운 대한민국' 세미나에서의 구두발표를 위해 작성된 글이며, 출판을 목적으로 작성된 글이 아니므로 저자 허락 없는 인용 및 전재를 금합니다.
[2] 세월호 사건에서 기억해야 할 아홉 가지 결론. 김영환 녹색당 정책위원. http://www.huffingtonpost.kr/younghwan-kim/story_b_550599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