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네 나이 때는 단 한 순간이라도 공부를 못할까 두려워했는데, 너는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도 공부를 게을리하니… 쯧쯧.”
문득 귀를 의심했다. 조선시대 영조와 사도사제 사이의 갈등을 그린 영화 <사도>의 한 장면에서 튀어나온 영조의 대사가, 마치 우리 시대 아버지 세대가 아들 세대에게 전하는 메시지처럼 들려서다.
영조의 이 대사는 얼마 전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던 한 신문사 논설위원의 칼럼 내용과 함께 귓속을 오래 맴돈다.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칼럼에서 필자는 ‘삼포세대’를 나무란다. 지하 단칸방에서 신혼을 꾸리면서도 ‘포기’라는 말을 몰랐고, 주어진 대로 오직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가던 시절을 떠올린다. 자신의 성장기보다 더 나은 환경에 있지만, 자신이 보기에 게으르고 변명을 일삼는 아들을 준엄하게 꾸짖는다.
최근 정부에서 도입하겠다고 나선 임금피크제를 놓고 세대 간 갈등 양상이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그 갈등을 보는 시선이 흥미롭다. 정부 쪽에서는 애써 ‘갈등이 있다’고 강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임금피크제는 정년을 앞둔 아버지 월급을 깎아 아들 일자리를 만드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고임금 받는 고령의 정규직 노동자들을 쉽게 해고할 수 있어야 청년들을 쉽게 고용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반대쪽에서는 애써 ‘갈등이 없다’고 강조한다. 임금피크제는 청년들이 나중에 나이가 들었을 때 맞게 되는 현실이니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집에 살고 있으니 아버지 임금 깎아 아들 임금 주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며 눈속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어느 세대든 어려운 사람은 다 어렵다면서 세대 간 연대를 통해 기업과 싸워 더 많은 것을 얻어내야 한다는 입장이다.
실은 두 입장 모두 공통적으로 외면하고 있는 진실이 있다. 아버지 월급 깎는다고 청년 일자리 생기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정부 주장은 눈속임이다. 하지만 아버지 월급 보존한다고 청년층이 그 나이까지 아버지와 똑같이 일하며 혜택을 받을 것도 아니다.
기업에서 청년을 새로 고용하려면 새로운 투자를 일으켜야 한다. 투자를 일으키려면 사업 전망이 분명해야 한다. 그것도 젊은 인력을 정규직으로 고용하려면, 장기적 전망이 있어야 한다. 당장 인건비가 조금 줄어든다고 바로 실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청년층이 처음 얻는 일자리 중 상당수가 단시간 아르바이트나 한시적 일자리인 이유가 거기 있다.
그리고 지금 그런 일자리 얻는 청년들이 법으로 정해진 정년까지 일하면서 임금피크제를 몇 살부터 시작하며 임금을 몇 %나 줄일 것인지를 고민하게 될 리도 만무하다. 그들은 평생 유목민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 임금피크제로 비용 줄여주면 기업들이 덥석 청년들을 대량고용해줄 리도 없지만, 세대갈등은 없다고 믿으며 다같은 노동자 의식으로 대동단결하자고 외쳐봐야 문제가 해결될 리도 없는 것이다.
사실 지금 표면에 드러난 세대갈등의 핵심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저녁식사 자리 논쟁만큼이나 단순하다.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과 같은 삶을 살아가기를 원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삶을 원하지도 않을 뿐더러, 원한다고 해도 자신은 살 수 없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학문에 정진해 공부 잘 하는 왕이 되어 학식으로 신하들을 다스리기를 원한다. 지금 준엄하게 패기 없는 청년 세대를 꾸짖는 분들과 비슷하다. 이들 중 대부분은, 좋은 대학 졸업하고 집 장만해 부동산값 상승의 혜택을 입고 정년까지 일하며 노년에도 자리 하나씩 차지하고 있는 분들이다. 그리고 아들이 자신을 따라 살아가기를 원한다. 공부하고 대학가고 좋은 직장 다니다가 집 사고 결혼해서 좋은 인생 살기를 원한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기존의 사회 질서가 그대로 유지되기를 원한다. 자신이 잃는 것은 없고 아들은 똑같이 자신의 방법으로 모든 것을 얻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 한국사회는 너무나 빠르게 변화했기 때문이다. 몇 가지만 따져 봐도 분명해진다. 어떤 면에서도 기존의 성장경로를 그대로 밟을 수 없다.
매년 7~8% 성장하던 경제는 이제 2~3% 성장으로 고착되고 있다. 안정된 직장 들어가고 월급 모으고 빚내어 집을 산 뒤 집값이 올라 부자가 되는 길은 더 어렵다. 사법시험이든 공무원시험이든 한번 시험 잘 봐서 평생 안정적으로 먹고 사는 일은 극소수를 빼고는 불가능한 사회가 온다. 새로운 길을 가지 않으면 다수가 성공하는 사회는 불가능하다.
영화 속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일을 맡겨 놓고도 안심하지 못해 다그치기만 하던 자신의 심정을 내보였다. “네가 실수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아니?” 실수했던 것은 영조였다. 아들의 실수 가운데 훌륭한 것을 살려 새로운 시대를 여는 동력으로 삼았어야 했다.
그나마 변화가 없는 조선시대였기에 다행이다. 하루아침에 엄청난 사회변화가 일어나는 지금이라면 재앙이었을 것이다. 사도세자는 영조를 거역해 뒤주 안에 갇혔지만, 오늘의 청년들은 아버지의 삶을 따라가다가 뒤주 안에 갇히게 될 지도 모른다. 고성장 시대이던 아버지의 방식만 따르다가는, 나라 전체가 뒤주 안에 갇힐지도 모른다.
이원재 희망제작소 소장/경제평론가
* 2015년 10월 1일치 <뉴스토마토>에 실린 글의 원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