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바뀌어야 삶이 바뀝니다.”
2012년 11월 어느날, 안철수 후보의 정책을 맡고 있던 나는 캠프 사무실에서 불편한 마음으로 벽에 붙어 있는 새로운 선거 슬로건을 쏘아보고 있었다. 내 책상 위에는 두꺼운 정책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
제 18대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이었다. 각 후보 캠프에서는 연이어 유권자들의 마음을 살 공약을 발표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단연 압권은 이른바 ‘지역공약’이었다. 우리 캠프에서 만든 그 ‘지역공약’들이 그 두꺼운 보고서에 담겨 있었다.
각 정당에는 지역조직이 있다. 이 조직은 늘 해당 지역의 여론을 탐지하고 중앙에 전달한다. 지역 여론이란 어떤 경우에는 날 것 그대로 표현한다면 지역 유지들의 민원사항이다. 주로 중앙정부가 돈을 들여 지역에 대형 시설을 지어달라는 지역토건개발 정책이다.
그래서 기존 정당에는 선거 때마다 사용할 수 있는 각 지역의 민원성 개발공약이 잔뜩 준비되어 있다.
무소속인 안철수 후보의 캠프에는 그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사실 그런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후보의 가치와 철학에 맞지 않는 약속은 아예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필요한 지역 개발 정책이 있다면, 집권한 뒤 충분한 정보를 갖고 의견을 수렴해 추진하면 된다는 게 진심캠프의 기조였다. 선거 때는 개발 필요성과 그것이 주는 사회 및 환경적 영향을 엄밀히 따지기 어렵다. 특정한 지역 이익집단의 요구를 받고 지역민의 환심을 사려다 보면, 불합리한 개발 정책을 약속하기가 쉽다. 그래서 우리는 지역 개발 공약을 성급하게 내놓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후보의 지역 방문 일정이 있을 때마다 사달이 났다.
가는 곳마다 후보가 만나는 지역 인사들과 언론에서는 ‘어떤 지역개발정책을 내놓을 것이냐’라는 질문을 집중적으로 퍼부었다. 지역 언론에는 끊임없이 세 후보의 해당지역 개발공약을 비교하는 기사를 내보내겠다며 질의서를 보내왔다. 지역개발정책을 내놓으라는 압박은 극심했다.
캠프의 명망가들은 각 지역으로 지원 유세를 하러 방문하곤 했다. 그 때마다 지역개발 공약을 만들어 달라는 강력한 요청을 받았다.
진심캠프에는 지역조직은 없었지만, 각 지역마다 진심캠프에 우호적인 인사들이 있었다. 상당수가 후보의 가치와 철학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개발공약에도 대체로 비판적인 그룹이었다.
이들 중 일부조차 나서서 지역공약을 내놓아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지역에서 이기려면 타협을 감수해야 한다는 진심어린 고언이었다.
단적으로 공항만 놓고 이야기하면 이렇다. 각 광역단체를 방문할 때마다 지역 공항을 확장하거나 새로운 공항을 지어야 한다는 요청이 나왔다.
다른 진영에서는 이미 약속했으니 우리도 해야 한다는 말이 뒤를 이었다.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필요한 일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대로 받아들이면, 대선이 끝나는 대로 전국 방방곡곡에 새로운 공항을 짓고 늘려야 했다. 전문가들의 검증과 공항의 사회적 환경적 영향에 대한 고려는 끼어들 틈조차 없었다.
물론 지역개발에 대한 요구는 공항에 그치지 않았다. 전국 여기저기에서는 새로운 고속철도와 고속도로와 심지어는 해저터널에 대한 욕구도 터져나왔다. 주요 도시마다 산업단지를 조성하기 위해 토지를 개발해야 했다.
하나하나 들어 보면 그 지역민들에게는 절박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경쟁 후보들은 이미 그것들 중 대부분을 약속했거나 검토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충분한 검토 없이 덥석 약속부터 한 게 분명했다.
결국 진심캠프에서도 지역공약을 준비하기로 했다. 태스크포스를 만들었고, 전국 각 지역의 여론을 모두 받아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 면밀히 검토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보고서가 바로 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전국 각 지역 유권자들의 욕망 – ‘열망’이 아니라 ‘욕망’ – 의 맨 얼굴이 가득 담겼을 지 모를 보고서였다.
공항을 짓더라도 항공사들이 취항을 하지 않아 활용되지 않고 텅 비어 있다면, 세금을 낭비하면서 환경만 파괴하는 일이 되지 않느냐는 내 질문에 대해 알만한 한 지역 출신 인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도 일자리는 만들어지니 지역에는 도움이 된다. 직원들이 놀더라도 그들이 받은 월급을 지역에 떨어뜨려 줄 수 있다. 어쨌든 중앙정부에서 온 돈이 지역에 풀리는 것 아닌가.’
이른바 ‘먹고사니즘’ – 나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이 된다면 다른 고려는 하지 않는 이기적 이데올로기로서의 – 이 다른 모든 가치를 압도하고 있었다.
어쩌면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마음의 조각이 있다. 수십 개일 수도, 수백 개일 수도, 수만 개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조각,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작은 한 조각은 분명 어떤 종류의 욕망을 대표하고 있다.
이 조각들 가운데 어떤 욕망은 매우 ‘건전’하다.
누구나 자신이 속한 사회가 진보하기를 바란다.
누구나 조금씩은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이 더 깨끗해지기를 원하며,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좀 더 나은 삶을 살기를 원한다. 또 자신의 자녀들은 자신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를 기대한다.
이런 바램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한 가지 욕망이다.
거꾸로 어떤 욕망은 날 것 그대로다. 그야말로 ‘먹고사니즘’의 여과 없는 표출이다.
자신이 속한 사회의 모두에게 피해가 가더라도 나만은 안전했으면 한다. 나와 내 자식만은 소외된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세금이 조금 낭비되더라도, 우리 집 근처는 개발사업이 진행되어서 내 집 내 땅값이 올랐으면 한다. 공교육이 중요하고 고등학교만 나와도 잘 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믿지만, 내 아이만은 외고와 자사고에 진학하고 일류대학에 가야 한다.
어떤 계기가 되면 모두의 마음 속에 있는 이 작은 조각들은 이리저리 합쳐지면서 어느 경우 엄청난 폭발력을 갖게 된다.
욕망이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사회적, 환경적으로 더 나은 삶을 향한 집단적 욕망은 민주화도 이끌고, 경제위기 때 전국민이 나섰던 금모으기 운동도 끌어냈고, 어려운 이들에 대한 기부 행렬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런 욕망이 집단적으로 모아지면 염원이 되고 여망이 되고 열망이 된다.
긍정적인 집단적 욕망이 국가의 과제가 되어 적절히 실현될 때 역사는 한 걸음 전진한다.
어찌 보면 정치는 그런 욕망을 잘 조율하고 조합해 사회의 긍정적 변화를 끌어내야 하는 사명을 가진 영역이다. 선거는 그런 계기 중 대표적인 것이다. 대통령선거는 그 정점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언젠가부터 정치 앞에서 사람들은 특정한 욕망만을 내보이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인이나 관료를 만난 사람들은 날 것 그대로의 이기적 욕망을 폭발시킨다. 그들의 요구 사항에 명분과 합리성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이해관계를 침해하면 바늘에 찔린 듯 분노한다.
배려와 합리적 토론은 오히려 아마추어적이고 무능한 행태로 치부된다. 사명과 명분을 나눈 집단이 될 수 있는 지지자 집단이, 순식간에 이익집단으로 돌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선거 때 그런 행동은 정점을 찍는다. 수백만의 마음 속에 있는 욕망의 조각들이 뭉쳐지면서 엄청나게 큰 욕망의 덩어리가 만들어진다. 표를 구하려 동분서주하는 후보들은 이 덩어리 앞에 굴복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가치와 이성은 설 자리가 없다. 그저 표를 팔아 이익을 사려는 유권자와 이익을 팔아 권력을 사려는 정치인 사이의 거래가 있을 뿐이다.
대통령선거 때의 지역개발 정책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물론 지역개발정책 모두가 문제는 아니다. 하나하나 뜯어 보면 공감이 가는 개발정책도 많이 있다. 지역은 소외되어 있고, 지역민은 가난하고 희망이 없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뭐라도 만들어 내야 한다. 중앙정부가 돈을 써서 개발사업을 벌이는 게 어찌 보면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이다. 일자리가 몇 개라도 생기고 땅값이라도 좀 오르면 지역에 돈이 풀리고 살 만해질 수 있다. 여기서부터 지역민이 희망을 찾을 수도 있겠다. 그곳만 놓고 보면, 절박하고 필요한 일일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런 정책을 팔아 표를 사려고 할 때 생긴다. 친환경적이면서도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지역개발정책을 만들어내는 것은 쉽지 않지만 불가능하지도 않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런 정책을 만들어 낸 다음에 일어난다. 무엇보다 어렵사리 만들어 낸 뒤에도 한 지역에서만 약속해서는 곤란하다. 다른 지역과의 형평성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한 지역에서 개발을 약속하기 시작하면, 사회 환경 경제적 합리성과 상관없이 모든 지역에서 개발 약속을 해야 하는 상황이 닥친다. 정치인은 약속을 하기 위해 지역의 요구를 묻고, 지역언론과 오피니언 리더들은 약속을 얻어내기 위해 요구를 나열하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그렇게 한 약속을 모두 합쳐 놓으면, 난개발이고 국고낭비고 욕망의 덩어리인 것이 분명한 모양새가 되어 버린다. 선의로 출발한 지역개발 약속이라도 말이다.
정치가 삶을 바꿀 수 있을까? 시계바늘이 이미 자정이 지난 그 밤, 나는 스스로 묻고 있었다.
정치는 민의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국민이 원하는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게 새로운 정치라고 했다. 그런데 국민이 정치에게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면? 민의가 바로 욕망의 덩어리라면?
원론적으로 정치는 그 민의조차도 충실하게 대변하는 것이 그 본연의 임무일 텐데, 그 과정에서 정치가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 오히려 공항과 고속도로와 다리를 향한 그 욕망이, 좀 더 장기적으로 공동체에게 도움이 되는 다른 무엇인가로 바뀌고 나서야 정치가 바뀔 여지를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정치가 삶을 바꾸는 게 아니라 삶이 정치를 바꾸는 게 아닐까?
지역개발공약 보고서 표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나는 벽에 붙어 있는 슬로건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정치가 바뀌어야 삶이 바뀝니다”라는 슬로건은 이렇게 바뀌어야 했다.
“삶이 바뀌어야 정치가 바뀝니다.”
** 이 원고는 제가 쓴 책 <이상한 나라의 정치학>의 일부를 2015년 12월 14일 열리는 '정치BAR-시민아 정치하자' 행사의 발표자료용으로 수정 작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