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막내의 등굣길에 동행했다. 신이 나서 아빠 손을 잡고 집을 나선 막내는 저 멀리 교문이 보이자 슬며시 손을 뿌리친다. 많이 컸구나, 속으로 감탄하면서도 마음 한쪽은 서운하다. 하지만 낯익은 교문 앞에서 그 마음은 스르르 녹아내렸다.
막내 입학식 날 교가를 제창할 때 나도 따라 불렀다. 첫째 입학식 때도 그랬다. 아이들도 학부모도 아직 모르는 교가를 나 혼자 큰 소리로 따라 부를 수 있었던 건, 아이들과 내가 초등학교 동창이기 때문이다.
내 고향은 서울이다. 어린 시절 자랐던 동작구 대방동에 아직도 산다.
하지만 나는 가끔 이 동네가 낯설다. 어릴 적 익숙하던 동네는 전혀 다른 곳처럼 변했다. 두부 공장 자리에는 신축 빌라가 들어섰다. 집 장사를 하려는지 층은 높고 칸은 많아 보인다. 두부를 팔던 구멍가게를 허문 자리에는 영어 학원 건물이 들어섰다. 산동네 무허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자리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식구들이 투닥거리는 소리까지 골목길 밖까지 새어 나오던 출입문은 자동 경비 시스템이 지키는 자동문으로 변했다. 공동 수도가 있던 자리는 흔적을 찾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이웃과 공동으로 무언가를 해야 할 이유가 줄었다. 생존을 위해서도, 여가를 위해서도 그렇다.
우리 동네의 변한 모습은 어쩌면 각자도생하는 한국 사회와 닮았다. IMF 구제금융 뒤 회사도 국가도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불안이 사회를 덮쳤다. 돈은 스스로 불려 자기 통장에 넣어 두어야 안심이고, 혼자만의 능력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믿음이 굳어졌다. 재테크 붐이 일었고 자기계발 열풍이 불었다. 선진국 평균 수준이던 자살률은 빠르게 높아져 세계 최고를 기록했다. 1인당 국민 소득이 서너 배 뛰어오르는 동안 벌어진 일이다.
그동안 우리 동네에서도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것도 있다. 단골 동네 빵집은 대기업 브랜드 빵집 사이에서도 힘을 내어 빵의 질이 나날이 좋아진다. 동네 이발소 아저씨는 끝끝내 그 자리를 지키며 머리를 깎는다.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 역시 그 자리에 버티고 있으면서 우리 집 두 아이의 모교가 됐다.
새로 생겨난 것들도 있다. 모교에 생긴 동네 도서관, 또 걸어서 15분 더 가면 있는 어린이도서관은 내게 삶의 소중한 쉼터가 됐다. 주말이면 아이들과 동네 도서관에 가서 온종일 죽치고 앉아 책을 통해 세계를 돌아다닌다. 비슷한 책을 고르는 동네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얼마 전 아파트 놀이터에서는 동네잔치가 벌어졌다. 중학교 1학년 아이 한 명이 아이디어를 내서 아이들이 모여 음식을 내오고 게임을 하며 종일 놀았다. 요즘은 드물게 보는 마을 잔치였다.
공동체가 허물어진 한국 사회이지만 가만히 보면 아직 동네가 남아 있다. 어쩌면 이제야 제대로 생겨나기 시작한 건지도 모르겠다. 학교 위에, 도서관 위에, 마을공동체 위에. 그렇게 정겨운 동네 위에 서울이 다시 세워진다면 좋겠다.
나도 다른 많은 이들처럼 언젠가 서울을 떠날 꿈을 꾼다. 그렇지만 지방 소도시에 작은 집을 얻어 글을 쓸 때도 ‘나의 살던 고향’ 서울을 그리워하게 될지 모르겠다. 그곳에서도 아파트 숲 사이 들어선 작은 도서관과 아이들과 떠들썩한 동네잔치를 그릴 수 있으면 좋겠다.
서울 사람은 고향이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내 고향은 서울이다. 지금 그런 것처럼, 앞으로도 영원히.
* <월간 에세이>에 실은 글입니다.